[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35) 장미꽃 ⑦
발행일1964-02-23 [제412호, 4면]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딕슨을 데리고 올 줄 알고, 과일을 사다놓고,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못만났다는 말을 듣자 화를 낸다.
『뚱딴지 같은 녀석 거피라도 끓여놓고 기다리니 안오는구먼』
어쩐지 맥이 빠진 얼굴이 된다. 그 모양이 고소하기도 하였다.
『내일 또 한번 가볼까요?…』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이 약간 움직인다.
『…만나서 잘 부탁해 보지요.』
『가능성이 있겠니?』
『있을 것도 같애요.』
나는 나대로 딕슨에게 지금가지 곱게 보이려고 하던 것을 버리기로 맘 먹었다. 입끝으로 좋다고 하지만 그 속을 누가 아느냐 하는 생각도 든다.
딕슨 보다는 김진호의 마음이 훨씬 솔직하고 맑은 물속을 들여다 보듯이 신뢰감이 간다.
(그까짓 자식 적당히 이용이나 하다가 모르는척 해버려야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딕슨과 같이 다니다가는 학교를 퇴학 맞을 염려도 있었다. 그날밤 나는 진호에게 편지를 썼다. 처음에는 노트 한페이지에 잔 글씨로 꽉차게 썼다가 너무 진호한테 굽히는 것 같아서, 찢어버리고 다음과 같이 간단히 썼다.
(나의 마음은 내 가슴 속에만 담아두기가 벅찬 것 같아서 장미꽃 속에 한 가닥을 숨겨두었어요. 그렇게 알고 그 장미꽃을 보아 주세요. 고적한 내 마음을 위하여 천주께 기구해 주세요.)
이것도 다시 읽어보니, 내가 나를 속이는 것 같아서 찢어버릴까 하다가 다시 쓰기가 귀찮아서, 눈을 딱 감고 봉투에 넣고 밥풀로 봉을 해버렸다.
이튿날 교문 앞 우체통에 넣고 돌아서다가 춘자와 마주쳤다.
나는 그를 쏘아 보았다. 눈물을 흘리며 등을 보일게 아니라, 힘껏 싸워 보리라는 결심이 솟구친다.
얘기한 바와는 딴 판으로 춘자는 샐쭉한 얼굴로 앞만 보고 선듯 선듯 걸어간다.
(네 까짓것 일대일이면 문제없다-)
이렇게 승리감을 느끼며 교실로 들어섰다. 나는 공부 시간이나, 노는시간이나, 전투태세를 갖추고 긴장해 있었는데, 춘자 「클럽」들도 김빠진 사이다 같이 잠잠했다.
방과후 교문을 나설 적에 나는 얼마간의 행복감을 느꼈다.
(깡통 얘기가 성공하면 아버지도 나를 그다지 미워하지는 않겠지!)
이런 생각도 하며 활기있는 걸음으로 「뮤직홀」로 걸음을 재촉했다. 「홀」에 가니 이날도 딕슨은 와있지 않았다. 마침 키다리를 만나서 물어보았더니 안왔을거라고 한다.
『쫄병이니까 여느날은 나오기가 어려울거야!』
그래도 한시간쯤 기다리다가 편지쪽지라도 써놓고 가려고 노트장을 찢고 있으니까 앞에 길다란 그림자 하나가 가린다. 딕슨이었다.
『어제도 너를 기다렸고 오늘도 기다리다가 가려던 참이었다.』
『대단히 미안하다, 근무 때문에 시간을 얻을 수가 없었다. 너의 성의를 기쁘게 생각한다.』
(정말은 깡통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코대답을 하며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키다리도 따라올듯이 돌아보는걸 모르는 척 하고 급히 걸었다.
행길로 나가면 곧 버스가 있었지만 미리 그에게 깡통 얘기를 떠볼 생각으로 걸었다.
딕슨은 내가 이틀이나 와서 기다린 것을 거듭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 딴에는 나를 꼭 잡은 듯이 좋아하고 있다.
『너 우리 아버지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지 않겠느냐?』
틈을 보아 나는 입을 열었다.
『부탁이라니, 무슨?』
『일전에 얘기한 깡통 말이다.』
『그런건 나의 책임 밖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느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부탁하는거니 나를 위해서 좀 들어줄 수 없느냐?』
『있는 모양이더라!』
『나의 상사인 「써잰」에게 물어보겠다.』
『힘을 다해서 되도록 해다오…』
『「써잰」은 나를 사랑하니까 아마 들어줄 것도 같다.』
이말에 나는 희망을 안고 즉시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동행을 했다.
아버지는 기대를 안하고 있었던양, 집에서 입는 무릎이 해진 양복 바지를 입고 커피 준비도 안하고 있었다가 딕슨이 왔단 말을 듣고 부랴 부랴 옷을 갈아입고 커피통을 내고 야단을 하였다.
나는 딕슨이 한 말을 아버지에게 옮겼다.
『정말이냐?』
한번 나에게 속은 일이 있는 아버지는 내 눈치를 상당히 살핀다.
나는 아버지도 알아듣게 딕슨을 향하여
『오케이!』 하고 다졌다.
『오케이!』
딕슨의 고개가 끄덕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과일을 벽장 속에서 내놓았다. 한시간쯤 앉았다가 딕슨은 사흘 후인 일요일 오전에 결과를 알아가지고 「뮤직홀」에서 만나기로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한길까지 따라나온 나에게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고향에 있는 부모에게 너에 대한 나의 희망을 편지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나는 두달후면 제대한다. 고향에 일단 돌아가서 다시 한국 근무를 자청해서 이곳에 돌아올 생각이다. 네가 중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그후는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를 나올 수 있다. 너의 그 학비를 나의 부모가 부담해 줄 것을 청했다….』
딕슨은 나의 놀란 표정에 부드러운 미소를 남기고 택시를 타고 떠났다.
사라지는 자동차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미스 양!』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진호가 옆의 담배 가게 앞에서 보고 있었던 양 굳어진 표정으로 가까이 온다.
『양키는 왜 또 만나?』
『아버지가 만난거야요.』
『그럼 아버지가 전송할 일이지…』
『……아버지는 말을 모르셔서 내가 대신 전송한거야요.』
『난 양키의 말을 몇마디 들었는데… 잘 못들엇는지는 몰라두 미국으로 미스양을 데리고 가겠다는 듯이 말을 하는 것 같던데…』
나는 갑작스런 일이라 고개를 저었다.
『…내 편지 못받으셨죠…』
『못받았어요.』
『내일 아침에는 들어 갈거야요.』
나는 아버지 핑계를 하고 진호 옆을 떠났다. 어쩐지 진호와 길게 얘기하는 것이 불안스러웠다.
그날밤은 딕슨의 말이 머리속에 꽉 차서 딴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미국?…』
어쩐지 맘이 그쪽으로 쏠린다.
『기거서는 흘겨 보는 눈도 없겠지?』
나는 일요일이 몹시 기다려졌다.
깡통보다는 딕슨을 만나 좀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토요일 저녁에 학교서 돌아오니 복순이가 살짝 편지 왔다고 귓뜀을 해준다.
책상설합을 열어보니 전과같은 흰봉투에 진호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뜯어보니 다음 일요일 열시미사에 교회에 나와서 같이 영화구경이라도 가자는 사연이었다.
곧 뛰어가서 못간다는 말을 전할까 하다가 진호를 만나기가 두려워진다. 망서리는 동안에 어느듯 시간은 자꾸 흐르고 말았다.
이튿날 딕슨과 약속한 「뮤직홀」로 가면서 교회에서 찾고 있을 진호의 얼굴이 자꾸 발걸음에 휘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