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르모」의 「파랄티네」소성당을 장식하는데 「모자익」의 한 장면인 「예수살렘에의 개선입성」에서 우리는 12세기 「비잰틴」미술의 한 탁월한 실례를 보게 된다.
주제 (마테오 21장1-11절)는 그리스도교 미술가들이 복음성서의 기록사실과 모순됨이 없이 왕의 위풍 당당한 미술이 격식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 「팔레르모 모자익」에서도 예수는 민중의 환호(『다위 자손은 만세무강 하소서.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오신 자 복될 지어다. 지극히 높은데서는 만세무강 하소서』)를 받으면서 성도 「예루살렘」으로 개선 입성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왕의 개선 행진의 자세가 복음성서의 사실에 알맞게 처리되었다. 그리스도는 성도를 향해 나귀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고 거 뒤를 문제들이 따르며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동방사람의 생김새와 차림새를 하였고 문제들의 후광은
그들이 거룩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테마」에 중세의 「비잰틴」미술가들이 끼친 가장 큰 공헌은 종교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명료성과 숙련된 기교이다. 그들이 당시의 미술에 대하여 가진 습관은 그들로 하여금 공산의 차원을 무시하게 하였고 또 「팔테르모의 모자익」에서처럼 화면의 중심인물들의 「구룹」을 마치 제대의 계단장식처럼 그리스도의 발 아래 있는 어린아이들의 장식적인 「그룹」으로 부터 분리시키고 있다.
「예루살렘」의 시가는 오른편 한구석에 나즈막하게 몰아 서 있다. 그러나 환영하는 무리는 삼층으로 된 약간 높은 단 위에 서 있다. 입구의 삼층 단은 확실히 사실대로 자연스럽게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대로 환영하는 사람들의 「구룹」을 그리스도의 「구룹」에 비해 알맞는 위치에 배치하는데 도움이 되며 또 화면 전체의 운동의 방향을 암시해 주는데도 큰 도움이 되고있다.
행렬은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경사는 인물들이 배치되어진 위치로 암시되어 있지 않고(그렇게 하였더라면 개선입성의 위풍이 손상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연이은 언덕들의 등성이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루의 경우 이것은 매우 기묘한 인상을 주게한다. 즉 베드루는 두 언덕을 동시에 밟고 있고 게다가 나귀의 앞발굽이 자기 발을 밟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다.
한편 베드루와 종려나무의 상대적인 위치 그리고 그리스도와 베드루의 정면을 향한 평행적인 자세는 화면의 구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미적인 면에서나 화면이 초점을 이루고 있고, 뒤로 돌린 베드루의 머리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문제들의 시선은 한가지로 보는 사람의 시선을 승리의 개선 입성을 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에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간다. 최소의 기교로 최대의 의미를 표현하는데 성공한 보기드문 예의 하나이다.
서울大 美大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