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16) 우정 ①
발행일1963-09-01 [제389호, 4면]
내가 동이 어머니에게 얘기한 것은 주로 공부방에 연탄을 안 들여주는 아버지의 인색한 점에 관해서였다. 식은밥 먹듯하는 그의 욕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다. 어쩐지 거기까지 폭로하는 것은 내 자신의 욕을 구경시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 집에서 하루밤을 자게 되었드라면 더 많은 이야기가 풀려 나왔을지도 모른다. 시원한 그 부인의 눈은 나의 모든 괴로움을 받아줄것만 같았다.
『너의 아버진가 보구나?』
동이 어머니도 짐작을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했다.
『실례 합니다!』
문밖에서는 또 한 번 부르는 소리가 난다. 그 목소리는 꽤 점잖다. 동이 어머니는 잠옷 위에 옷을 씨워입고 나갔다. 잠시 후에 대문이 열리고 문간에서 소근소근 나직히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둑한 밤이라 하나하나 내 귀에 들린다.
집을 나간 설명을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버릇 나쁘다고 좀 꾸중을 했더니 불 안들인 냉방에서 쭈그리고 앉았다가 그냥 튀어 나가니 이 애비의 마음이 어떠하겠읍니까? 딸이라고 그거 하나를 애지중지하며 기여워하는데 애비의 공도 모르는군요…』
동이 어머니가 들어오더니 아버지 따라 집에 가라고 한다.
나는 그 때 안방을 나와 옆의 다다미방에서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뜰로 향한 유리장지 문앞에 나타났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도 우정 다다미방에 주저 앉았다.
『나순아 동이네 집을 괴롭게 하면 못 써 어서 집에 가자!』
아버지는 열린 유리장지 끝에 앉으며 부드럽게 말한다.
누가 보아도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할만큼 그의 말투며 그의 얼굴 표정은 부드러웠다.
『요만때는 반항하고 애먹이는 시기인가봐요…』
동이 어머니는 웃으며 말한다.
『정말입니다. 그저 반항을 하는군요. 따끈따끈한 아랫목을 비어놓고 와서 자라면 일부러 냉돌에 가서 자겠다고 하잖읍니까? 흣흣…』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미소가 아버지의 입가에 떠오른다.
장지문 아픙로 나와서 운동화를 신을 적에 아버지는 내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왜 애를 먹이니?』
하며, 말한다.
(남이 보면 쓰다듬고, 안 보면 잡아 끄는 머리채!)
나는 속으로 이렇게 반항하며 동이네 집을 나섰다.
『나순아 아버지 말씀 잘 들어!』
동이 어머니가 문간에 나와서 이렇게 말한다. 동이 어머니도 내가 나쁜 걸로 알른지 몰랐다. (언젠가 동이 어머니한테만은 자세한 얘기를 다 해야지!)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쓸은듯이 인적이 가신 심야의 밤길을 걸었다.
마침 달이 떠서 내 그림자와 아버지의 그림자가 나란히 앞에 비친다.
『…너 어쩌자구 집을 튀어나가느냐? 이년…』
예기한 바와 같이 동이네 집이 멀어지자 날카로운 말이 나온다.
『………』
나는 묵묵히 내 그림자만 바라보았다. 보름이 가까운 둥근 달은 마침 중천에 있었으므로 그림자는 때때로 이중으로 빛었다. 짧은 그림자는 진하게 비치고 긴 그림자는 흐릿했다. 흐릿한 그림자는 길다랗게 늘어지다가는 사라지고, 발밑에서 다시 솟아났다.
『못되년, 또 한 번 집을 튀어나갔단 봐라…』
나는 아버지의 말보다는 발밑에서 솟아나서 꺼져버리는 그림자에 흥미를 느꼈다.
『못된년…』
뭐라고 해도 나는 가만이 있었다.
열두시가 다 되었으므로 차는 끊어지고, 삼십분의 도정을 걸어가는 동안 씨부렁댄 것은 아버지 혼자였다.
집에 돌아오니, 열두시 십분이었다.
나는 주먹 몇 개가 내 머리통에 올 줄 알았는데 한 말을 되했을 뿐 아랫목에 피어있는 내 이불을 가르치며 자라고만 소리쳤다.
나는 푸대 속에 들어가듯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썻다.
집을 나간 일은 이튿날 약간 효과가 나타났다. 학교서 돌아오니까 건너방 아랫목이 따끈따끈했다.
복순이를 불러 물었더니 아버지가 오늘부터 연탄을 넣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후 며칠 후에 학교서 돌아오는 길에 동이네 집에 들렀더니, 진호한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아버지가 편지를 찢어버리기 때문에 아주머니네 주소로 했어요』
나는 말했다.
『누구니, 편지 한 사람』
『대학생이야요』
『후렌드냐?』
『응. 아버지는 「후렌드」를 이해 못 해요』
한 모퉁이에 와서 편지를 읽어보니 기대한 바와는 달라 좋다느니 사랑하느니 하는 말은 없고, 교회에 자주 나오라는 말 뿐이었다.
『뭐라고 했니…』
동이 어머니가 묻기에 편지를 내보였다.
『이런 편지를 왜 찢어 버리니?』
동이 어머니는 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서 난 아버지 싫어요』
전에 온 편지는 이것보다 좀 다른 편지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교회에 가지를 않았다. 일요일 오전은 「크라스메이트」 강숙이가 저의 집 근처에 사는 미군 부인한테서 영어회화를 배우자고 해서 지난 주일부터 다니고 있었다. 어느날 새벽미사에 가자니 추운데 일찍 일어나기가 싫었다.
아버지는 교회에 가는 것보다는 영어 공부하러 가는 것을 찬성했다.
그리고 한달 후 교내 영어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강숙이도 나갔으나 등 외에 떨어지고 나는 고교생까지 물리치고 일등을 했다. 상장과 상품으로는 영한·한영 두 권의 사전을 받는 날, 아버지는 나비 넥타이를 매고 점잖게 임석하였고, 담임선생과 교장선생님 앞에서 내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의 교육을 위하여 자기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를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였다는 말은 없고, 그저 교육을 위해서 애쓴다고만 되풀이 했다.
『역시 그런 아버지가 뒤에 계셨군요…』
담님선생은 멋도 모르고 장단을 친다.
그날만은 집에 돌아와서도 아버지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다. 비싼 생과자도 다섯개나 사오고, 낡은 가죽 「트렁크」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이 가방은 옛날에 월급이 오십원씩 할적에 삼십오원이나 주고 산 좋은 가방이다!』
진한 죠코렡색이 군데군데 벗겨진데는 있었지만 탄탄하고 야물었으며 요새는 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속에 내복도 넣고 일기도 넣고 애끼는 물건은 다 넣었다. 나도 이날만은 기뻤다. 그리고 아버지가 좋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이튿날 학교에 갔을 때 오히려 그 이상의 슬픔으로 변했다. 늘 나보고 퇴기라고 수소문하던 춘자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들으란듯이 지꺼려댄다.
『야아 아무리 영어 천재라도 중2가 고교생들까지 물리칠 수 있니? 퇴기 아니고야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 하니?…』
아이들 중에는 민망한 표정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눈은
『그래서 일등한거?』
이런 표정을 담고 돌아보았다.
나 하나를 이단시하는 많은 눈이 공부시간에도 그 눈들이 내 안막에 아프게 서린다. 노는 시간에도 모두 나를 경원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보다는 내가 그들을 경원하여 혼자 강당 뒤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강숙이만은 내 편이 되어 주었다. 방과후에 남보다 빨리 신을 신고 덤석덤석 걸어가자니 강숙이가 부르며 뛰어왔다.
『나순아 우리 ㅇㅇㅇ에 영화보러 가자! 학생 입장 환영이야』
『나 돈 없어.』
『나한테 있어!』
외로운 때니만큼 강숙이가 고마웠다.
영화관에 가니까 아직 시작 전인데 학생들이 많았다. 힐긋 뒤를 돌아보니 춘자들의 한 패가 두서너줄 건너,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뒷 모양도 양키지 뭐니?』
이런 소리가 들린듯 했다.
얻어맞은 것같이 머리통이 찡한다.
영화를 보는동안 잠시 잊어버렸다가도 자꾸 춘자들의 눈초리가 설렌다.
나는 내 출생에 대해서 진실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