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 예수 그리스도, 「그후에 디베리아 호수라고도 하는 「갈릴레아」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읍니다.
이에 앞서 주께서 38년동안 앓고 있던 병자를 낫게 하신 날이 마침 파공날이었기 때문에 파공날을 해이(解弛)케 할 뿐 아니라 또 자기 부치이 천주라 하며 자기가 천주와 같다 하여 유데아인들은 예수를 더욱 죽이기로 꾀하였읍니다.
주는 사랑의 마음에서 영적과 복음의 활로 유데아인들의 마음을 쏘아 꿰뚫으려고 하셨지만 차가운 돌덩이 같은 그 마음엔 종내 화살이 박하지 않았읍니다. 도리어 살은 되돌아 와 주를 해치려고 하니 그들을 피할 수 밖에 없었읍니다. 만일 그들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들 사이에서 거러하시면서 더 큰 영적을 행하며 더 오묘한 복음을 전해 주셨을 것입니다. 언성을 높이는 자를 부드러운 말로 다스리는 격으로 주는 겸손하게 그들을 피해 「갈릴레아」 바다를 건넜읍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거기서 오늘 행하실 위대한 영적을 맛보게 하시기는 커녕 보여주지도 않으셨읍니다. 진주를 돼지에게는 못주는 법입니다.
때는 유데아인의 「빠스카」 첨례날이 가까왔던 시절이었읍니다. 일년전 그 시절에 주를 위해서지만 요안 세자가 억울하게도 헤로데 손에 죽었으니다. 이번에는 주께서 우리 때문에 억울하게 빌라도 손에 죽게 되셨읍니다. 죽기 전에 위대한 사랑의 영적을 행하시려고 장소와 때를 가리실 뿐 아니라 그 영적을 받아들일 사람을 고르셨읍니다. 곧 선의(善意)의 사람들, 영적을 보고서는 마귀 으뜸 베엘제부니까 마귀를 내쫓는다느니, 파공날에 영적을 행하니 옳은 선지자가 아니라느니 하는 고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훌륭한 선지자를 저희에게 내려주셨다고 천주 성부께 감사하며 하늘에 영광을 돌리던 사람들이었읍니다.
종도들과 계시되 부질없이 앉아 계시지 않으시어 그들에게 백성에게보다 더 많은 교리를 가르치시고 있을 때였읍니다. 그때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바라보셨읍니다.
장차 『우리에게 천주 성부를 밝히시면 족하리라』고 묻게될 빌리버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에게 『무리를 먹이기 위하여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살꼬?』하셨읍니다. 무엇을 하실지 이미 아시면서 물어보시는 까닭은 그와 종도들에게 사태(事態)의 긴박(緊迫)함과 영적의 위대함을 더 길이 알리기 위해섭니다. 빌리버 대답대로 『각 사람으로 하여금 약간 조금씩 받게하려 하여도 2백금어치 떡이 부족』할만큼 사람이 많았읍니다. 스무살 이상의 남정(男丁)만 하여도 5천이 넘었으니 부녀자를 합치면 만명쯤 되지 않겠읍니까?
아름다운 도리를 듣고, 기막히는 영적을 보려고 침식을 잃고 따라 왔지만 3일을 굶고 보니 노곤하여 쓰러질 듯이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았읍니다.
옆에 있던 안드레아가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둘을 가지고 있다』고 아뢰면서 그 옛날 엘리세오 선지자가 보리떡 스무개로 백명을 먹인 것을 생각지도 못햇는지 『그러나 이같이 많은 자에게 요것이 무엇이오니까?』하였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적을 행하실 때 비록 기성(旣成) 물건을 쓰시긴 해도 사람이 적거나 많다고 해서 물건도 적거나 많아야 할 필요는 없었읍니다. 떡 다섯개로서는 만명이 넘는 사람을 도저히 먹이지 못하니라고 생각했으며 안드레아는 신앙이 부족했읍니다. 영적을 행하실 때마다 신앙을 요구하신 주께서는 신앙이 약한 종도들을 섭섭히 여기셨읍니다.
그러나 배고파 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족 베불려주실 마음으로 서슴지 않고 『사람들을 앉게하라』고 명하셨읍니다. 서성거리는 백성들을 진정시키신 다음 떡을 가지시고 사례하셨읍니다.
마치 수난전날 성체대례(聖體大禮)를 세울 때처럼 사례하셨읍니다. 이로써 종도들은 이 영적이 성체성사와 관련이 있음을 깨달았고 『나는 하늘로 조차 내려온 생활한 떡이로다』는 저 유명한 성체 강론을 나중에 더 깊이 알게 되었읍니다.
반신불수를 고치실 때나, 죽은 자를 소생시킬 때, 풍파를 일으킨 바다를 진정시킬 때는 안하시던 신공을 왜 이때는 하셨겠읍니까? 더 큰 영적을 행하실 때에도 신공을 안하셨으니 신공으로 영적 능력을 얻으시려고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천주 성부의 뜻을 따라서 영적을 행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남모르게 영적을 행하실 때는 신공을 안하셨고 많은 사람 앞에서는 신공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영적이 천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음을 밝히셨읍니다. 요술이나 마술처럼 우리 정신을 혼란시켜 눈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예수, 이에 떡을 가지시고 사례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읍니다.
떡을 손에 잡고 나누어 주실 때에 영적이 이루어 졌는데 떡을 떼내어도 손에는 여전히 온전한 떡이 남아 있었읍니다. 조각으로 나누어진 떡이 손을 넘쳐 흘렀읍니다. 그러나 그렇게 역력히 보이는 손재주(영적의 과정)일지라도 눈(五官)은 따를 수가 없었읍니다. 없던 것이 생기는 것을 보고 이해는 못할망정 천주께서는 만사를 잘 하실 수 있으리라고 사람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보리씨가 땅 속에서 썩은 후에야 싹이 돋아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데, 땅 속에서 죽은 보리씨가 어떻게 하여 백개의 보리알을 낳는지는 몰라도, 땅을 창조하신 그리스도의 손에 쥐어진 다섯개의 보리떡이 만명을 먹일 수 있을만 하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종도들에게 떡을 백성들한테 나눠주게 함으로써 그들은 추켜 올려 주셨을 뿐더러, 자기네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영적을 시일이 지나도 잊지말게 하셨읍니다.
백성들에게 떡과 물고기만을 공통하게 나누어주심으로써 평등과 겸손과 사랑을 깨우쳐 주셨읍니다.
오늘날에도 부자나 걸인이 똑같이 성체를 모시되 부자가 걸인을 멸시하지 않고 걸인이 또한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으니, 평등과 겸손과 사랑을 보이고 있읍니다.
이 영적의 교훈이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미 배부른 후에』 온전한 떡은 남지 않았지만 조각이 남도록 풍부히 하심으로써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영적의 사실이 있었다는 점과 상상(想像)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리고자 하셨읍니다.
『이에 조각을 거두어 열 두 광주리를』 채웠읍니다. 선지나나 성인들은 천주께 한정된 힘을 얻어 영적을 행하니, 전능하신 그리스도처럼 조각이 풍부히 남도록 하지 못하였읍니다. 주는 영적 격식에 있어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니 곧 그들의 주(主)심을 알겠읍니다. 주는 스스로 절댓권을 가지고 오늘날에도 떡 영적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남은 조각은 사람들에게 갖고 가지 못하게 하시고 종도들 손에 남겨 두었는데 열 두 광주리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게 남기셨읍니다. 종도들은 이것을 하나씩 맡이 만민에게 갖고 가서 영적의 떡을 나누어 주게 되었읍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자꾸 뒤다라 옴을 두려워해서, 종도들은 그리스도께 군중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사고 간청한 바 있지만 돌아가는 도중에 쓰러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시고는 측은한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고맙게 떡을 마련해 주셨읍니다.
우리는 사흘 이상을 굶으면 죽을 위험에 빠집니다. 일년에 영성체 두세번 하고서는 집으로, 천당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쓰러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배고파 하는 우리에게 주께서 떡을 주시는데 안받겠다고 사양하거나 피하는 실례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盧景三 神父(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 · 대구 범어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