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敎會議(주교회의)에 期待(기대) - 교회建築(건축)문제
典禮(전례)와 意合(의합)토록
교회 建築(건축)의 神學的(신학적) 基礎(기초)
발행일1964-03-08 [제413호, 2면]
(5) 祭臺
(지난호 제1면서 계속) 제대는 그 사명을 따라 상석(床石)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이전이나 이교신전의 제대와 비교할 수도 없다.
제대는 주님의 식상이다. 제대의 역사적 형태를 볼 때 성찬에서 기인(起因)치 아니한 다른 동기가 그 본질을 덮어 가끔 식상의 형태를 잃었다 하여도 제대의 본 취지는 변할 수 없다. 제대 축성에 있어 주교의 말과 거동(擧動)은 제대가 식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제대를 그 품위(品位)에 알맞도록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덮어버리게 해서는 아니된다. 제대는 감실(龕室)을 위한 기저(基底)도 아니며 십자가나 촛대나 입상(立像)도 아니며 십자가나 촛대나 입상(立像)이나 꽃을 위한 기저도 아니다. 이것들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제대의 본질적 것을 침해해서는 아니된다.
주의 식상으로서의 제대는 영성체자들을 위해서도 역시 식상이니 이 식상에서 그리스도를 음식으로 영해주기 때문이다. 영성체를 위한 난간(欄干)을 세워 놓은 성당도 있는데 그것은 식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식상 모양으로 만들어서도 아니되며, 제대와 분리시키는 난간이 되어서도 아니된다. 회중의 모든 지체(肢體)는 비록 멀리 혹은 가까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식상 옆에 있어야 한다.
-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 언제든지 첫째와 말째가 있을 것이다. 제댓간과 신자들의 회중석은 모든 이에게 주께서 가까이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느끼게끔 정비할 것이다.
(6) 龕室
미사성제의 거행에는 시작과 절정(絶頂)과 결말이 있다. 옛 시대에는 이것이 다음 사실로서 명백히 드러났다. 즉 미사 시작에 제대를 들여와 그것을 사제와 백성사이에 세워 놓았고 미사가 끝난다음에 그것을 다시 치웠다. 후대에 제대를 고정시키게 이르러 영성체 하고 남은 성체를 미사 후에 제대에서 떨어져 있는 감실에 모시게 되었다.
근대 종교의식의 발전을 따라 모셔둔 성체 대전에 드리는 신심(信心)이 유행되었다. 그리고 감실은 미사성제 외에 개인적이나 단체적인 신심의 중심을 이루게 되어 제대 위에 모시게 되었다. 이것은 여러모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의 중심으로서의 제대의 의의를 망각하게 하였다. 미사에 참된 참여는 가끔 성체조배에 뒤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례적 경신례(敬神禮)의 본질에 대한 반성으로 우리는 미사성제와 그외의 경신례적 신심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미사성제의 거행과 성체조배는 명백히 구별되어야 하며 또한 제대와 감실도 각각 상응한 규격을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 교회법은(1268조-1269조) 성체성사를 성당의 제일 합당한 장소에, 즉 달리 더 합당하고 적당하게 보이지 않거든 대제대위에 안치(安置)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대제대 위에 안치하는 것 보다 다른 제대에 모시는 것이 더 합당한 경우에는 다른 제대 위에 모셔둘 수 있다. 주교좌 성당이나 신학교 성당에는 그렇지 않아도 특별한 성체제대를 설비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제대와 감실의 고안(考案)과 작성에 있어 미사성제 거행이 성체 조배와 명백히 구별되게끔 노력할 것이다. 또한 성전에 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사드리는 장소와 성체조배 하는 장소를 명백히 구별하게끔 성전을 구성할 것이다.
예컨대 성체조배를 위한 격리된 장소를 설비함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에도 미사성제가 항상 성체조배의 시발(始發)이며 완성이라는 것을 알게할 것이니 미사를 드릴 때 누구나 제대가 중심이요 감실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할 것이며 미사성제 외에도 역시 제대는 성전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7) 領洗所
영세자(領洗者)는 성세성사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안에 이루어지는 생활공동체(生活共同體)에 즉 볼 수 있는 교회에 버벅으로 -성사적으로 결탁된다. 영세소의 장소와 위치와 구조를 선택함에 있어 주의할 것은 영세로 말미암아 교회 내에서의 생명이 시작되고 새로운 지체의 증가는 전체 그리스당에 관계가 있으며 특히 영세받은 자가 탄생된 신자단체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명심케 할 것이다.
그래서 성세대는 신자들이 보는데서 성세예절을 할 수 있도록 설비할 것이다.
성세예절은 성당입구로부터 영세소에 이르는 어느 정도의 간격을 요구하고 있으며 영세소를 거쳐 신자들 자리에 이르도록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보통으로는 성세대(聖洗臺)를 성당 안에 설비할 수 밖에 없으며 또 이렇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 다음 영세소는 전체 공간으로 보아 성당 입구편에 있도록 하고 성당의 중심에 예속시켜 설비할 것이며 독립적으로 서 있도록 하지 말것이다.
성세대를 제대 칸에 들려놓지 말것이니 영세가 성찬참여를 선행할 것이기는 하나 이 두가지를 첨부시킬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사동안에 신자들에게 자신의 영세를 회상시키기 위하여서나 혹은 일종의 상징적인 인상을 주기 위하여 제대와 성세소 사이에 어떤 상징적인 관련성을 설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영세와 영성체가 비록 연속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과정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다른 두가지 사건이 무리하게 겹치게 되는 것이다.
(8) 告解所
역사적으로 훌러가는 이 세상에서 말세적인 완성의 신비가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또한 악의 신비 즉 거짓 그리스도가 또한 활동하고 있다. 이 세속의 군주인 악마의 간단 없는 이 발악을 거슬러 죄를 없이 하는 고해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루어진다.
고해성사는 직접으로 성체성사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당 안에 다른 장소와 같이 미사거행과 아무런 직접적인 장소적 관계를 갖지 못한다.
고해성사의 효험은 직접으로 다만 고해자에게만 유효하다. 그러나 고해성사도 공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니 대저 사죄(赦罪)함은 감각할 수 있는 양식으로 교회의 풀고 맺는 권한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해성사에 있어 중요한 것은 고해자와 고해신부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對話)가 아니다. -물론 이것을 무시할 것은 아니나- 고해성사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고해자의 고백(告白)과 고해신부의 사죄경(赦罪經)이다 사제(司祭)는 여기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도구(道具)일 따름이다. 따라서 정당한 예외를 제외한다면(예컨대 수도원에서 피정할 때) 고해성사의 집행(執行)은 공적이라야 하며 또한 교회의 성사로서의 합당한 장소를 요구한다.
(9) 信心業行과 묵상의 場所
성전은 경시예식(敬神禮式)을 거행하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과 단체의 신심과 묵상을 위한 장소다. 경신예식도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한 기도의 태도를 전제하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묵상신공이나 흠숭기도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는 둘다 적당한 때에 정당한 맘의 태도다.
그러나 성당에서 다른 모든 행사가 그러하거니와 개인적이거나 단체적인 신심업행도 역시 그리스도의 ㅎ 녀현의 사건과 관련되어야 그 생명과 뜻을 얻게된다.
성전은 신심업행을 위해서도 또한 도움이 되도록 구성할 필요가 있다.
성전 안에는 신적(神的) 것과 속적(俗的) 것 영원한 것과 현세적 것이 서로 만나게 된다.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현현과 성사(聖事) 안에 계시는 천주님의 현존으로 성전은 다른 건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성전축성시에 건물은 천주께 봉헌되니 이는 해당건물이 천주의 집이 되기 위함이다.
성전은 또한 전례적 경신례를 위한 경신당일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천주대전에 바치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 곤궁과 고통의 온갖 탄원을위한 처소이다. 따라서 성전건축에 있어 미사성제를 무엇보다 중섬으로 삼을 것이기는 하나 여러가지 필요성을 참작할 것이니 전체고안(考案)에 있어서나 여러 장소를 설비함에 있어서나 내부장치에 있어 너무나 편벽되게 한가지만을 강조하거나 과장하지 말것이다. 성전건축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그리스도교적 진리에 이바지한다는 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