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角(시각)] 用語(용어)·要理問答(교리문답)·祈禱文(기도문) 現代化(현대화)
平信徒의 精誠 받아들이고
偏見대로 推進되는 일 없어야
발행일1963-09-08 [제390호, 1면]
때때로 자기 만족에 잠길 때 내 마음 속에 울려오는 시(詩)가 있다. 그것은 독일 가톨릭 여류작가이며 예술가인 루트.샤우만(RUTH SCHAUMANN)의 『천주여, 나로 하여금 나는 착하다고 여기게 하지 마소서.』
O GOTT LASS MICH NIE MEINEN ICH WARE GUT-라고 시작되는 기구의 시다.
『나는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면 벌써 꽉 채워져서 발전과 향상의 자리가 없다. 성모찬가에 있는 배부른 자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낭패를 당하게 된다. 뉴먼 추기경이 그리스도교적 실존성(實存性)을 안한(安한)하게 있는 것은 위태(危殆)에 있는 것이라고 갈파한 것을 다시 한 번 연상하고 싶다.
『TO BE AT EASE IS TO BE IN DANGER』
세기 후반기의 안일과 순풍에 사소한 풍랑과 불협화음은 없지 않으나 영원에의 항해를 즐기고 있는 교회를 흔들고 그의 꿈자리를 깨울려고 한 것이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소집하신 그 분의 의향이었으리라.
바야흐로 세계사는 최근대에서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될 시대에로의 과도기의 격동 속에 있으며 교회도 이에 대처해서 그의 자세를 고쳐가질 내적 요구에 민감했을 따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의 잃어진 벽지에 사는 우리도 현실 만족이나 더우기 자기도취의 단꿈을 언제까지 꾸고 있을 때는 지났다고 느낀다. 밖으로는 세계사의 일대전환기에 서서 몸부림치는 인류, 안으로는 정치적 사회적 중대한 과도기에 임해서 한국 가톨릭 교회는 자기의 위치와 자세(姿勢) 및 그 사정(射程)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당면한 급선무이다.
우리가 이번 공의회 개최 전에 이미 표명한 것처럼 한국 가톨릭 교회가 이번 공의회의 성과의 적용을 받으려면 현대 교회가 펴고 있는 전선까지 전진해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가 후진적 교회가 아니라고 증명할 만한 것을 들래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입장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기야 형식적이나마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으며 또 교세도 숫적으로 이웃나라에 비해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으니 일반 대열에서 낙오를 하지는 않았다고 우겨대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교회가 교회의 신적 사명(神的使命)인 천주의 나라의 건설, 사회 개혁을 그 땅에 수행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그 민족과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집단은 후진성과 저개발이란 딱지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 가톨릭의 저개발성이 노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인적·지적 자원을 매장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개발되고 조직화되지 못하고 사장(死藏)되고 있으며 유휴(遊休) 상태에 있다. 교회는 마땅히 이것을 교도하고 자기의 사명 수행에 이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도리어 그들의 봉사와 용역(用役)이 방해받고 있다는 사태라는 것이 뜻있는 사람들의 고민이 된 바 오래다.
이제는 대체로 비관적인 체념을 자아내게 하고 아예 교회를 위해서는 일할 수 없다는 무용물(無用物)이란 자의식(自意識)을 갖게끔 만든 책임은 누구에게 돌려야 하나?
몇달 전 어떤 가톨릭 지성인은 이 저개발성과 안일무위를 일갈(一喝)한 바 있는데 이러한 평신도들의 울분은 문제의 절박성을 노출해 준 것으로서 일반 평신도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므로 감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평신도의 여론과 평신도의 비관의 문제는 이미 선진적인 교회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뉴먼 學士會의 『갈대』誌에 이미 게재된 바 있다.)
1947년 서독의 순평신도경영지(誌인 「프랑크풀터·헤프트」에 여류작가인 이다.프리드리케.괴테스의 성직계급에 대한 비판이 게재되어 주교단의 주목을 끈 바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잡지 경영 자체나 또는 거기에 토로된 비판 등에 엿보이는 평신도의 발언권은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평신도들이 영세와 견진 때 영문 모르는 『잡부금』같은 것의 요구에 대한 비난과 낯뜨거운 사태에 격분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동성당」에서는 적어도 새 본당 신부의 부임으로 국부적인 것이라고 바라고 싶은 사태가 없어지고, 교회의 적(敵)이 즐겨 쓰는 『면죄부(免罪符)』의 비난을 들을 위험성이 소멸되고 다시 고해성사를 보다 쉽게 받을 수 있다는 한줄기 명랑한 사실을 평신도는 토로하고 있었다.
일본 가톨릭 지성지(知性誌) 「세기(世紀)」에서 일본 평신도의 호라동에 대한 힌트를 얻은 일지성인은 『우리도 모여서 한국 교회의 당면한 과제에 관한 좌담회나 가져보자』고 제안까지 해왔다. 요는 사회참여와 현존을 위해서 가톨릭의 사회 침투를 목적화한 가톨릭 지성인의 훈련과 조직이 전능적 하강식(全能的 下降式)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평신도의 「이니시어티브」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하며 다만 교회 당국은 유능한 조언자로서 이를 보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들의 조력을 얻어서 해야할 일은 가톨릭 용어(用語)의 현대화 제정(制定) 및 보급, 요리문답 개정 기도문의 현대화 등의 사업이다. 이러한 중요한 사업에 평신도를 제외한 현대적 감각으로부터 유리된 너무나도 일방적 편견에 의한 추진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절규에 귀를 기울여 줄만한 진보성을 바라고 싶다. 9월부터 재개되는 공의회 제2회기에는 평신도를 참여시키자는 의견이 강력히 주장되고 있다. 분리된 교회의 「옵서버」들의 참관이 허용되었다면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계속)
筆者=예수會員·大建大神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