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10) 「천주의 종」 민(Huin) 신부
滿洲 遼東에서 한겨울 待期
죽어서 기틀잡아 傳敎地 채 모른 閔神父
발행일1963-09-08 [제390호, 3면]
불란서 「랑그르」구에 태어나서 그곳 교구 신학교에서 신부가 되었다. 그 후 약 2년동안 보좌신부로서 자기 교 구에서 활약하다가 마침내 외방에 전교할 결심을 하고 1863년 빠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즉시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 다음해 백·김·서 세 신부와 같이 한국으로 향했다.
그들은 역시 빠리외방전교회가 활약하고 있는 만주 요동에로 가서 우선 강주교의 지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입국이 지연되게 되자 그들은 한 겨울을 기구 가운데 한편 한문을 열심히 공부하며 지냈다. 마침내 상해에서 배편을 얻어 황해를 횡단하여 충청도 내포 지방에 무사히 이르렀다.
그 때 내포 지방에서 전교하고 있던 안 부주교는 교우를 보내어 그들을 우선 자기 집으로 오게 하여 여로를 풀게한 후 민 신부만 자기 밑에 남겨놓고 다른 세 신부는 서울 장 주교한테로 보냈다.
민 신부는 안주교 밑에서 열심히 한국말 공부를 한 결과 불과 반년만인 즉 병인년 초엔 고해성사도 줄 수 있게되어 거더리에서 십리 떨어진 황무실의 교우들을 맡아보게 되었다.
민신부는 만주에서 듣던 소문과는 딴판으로 한국이 의외로 고요하여 큰 장애 없이 전교할 수 있음을 무척 기뻐하고 있던 찰나에 서울서 장주교가 잡혔다는 소식이 날라왔다. 민신부는 즉시 안주교한테로 쫓아갔다. 안주교는 자수할 생각을 이미 갖고 교우들에겐 기구로써 지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하 신부들에겐 천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행동할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민신부는 돌아와서 얼마동안은 안전할 수 있는 곳에 숨었다.
한편 3월14일에 자택에서 잡힌 안 주교는 포졸들이 신부를 잡으려고 교우들을 너무 괴롭히고 약탈할가 두려워 민신부에게 교우를 보내여 자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내포 지방의 세 사도는 모두 잡혀서 서울로 압송되게 되었다.
때마침 고종왕이 병 중이어서 그들의 사형장을 충청도 수영에로 옮기게 되니 민신부는 고문으로 인하여 두 다리의 헤어진 살을 기름 종이로 붙인채 수난의 길을 종시 기쁨에 찬 얼굴로 걸어갔다.
병인년의 예수 수난날인 3월30일, 민신부는 안주교와 오신부와 다음 세 번째로 포졸의 칼을 받아 참수 치명하니 때에 나이 약 28세, 한국 교회의 신자의 씨가 될 뿐더러 또한 전교신부의 씨가 되고자 긴 전교 생활에서 흘린 많은 땀 대신에 그의 귀중한 피를 몽땅 바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