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난 6개월을 앞두고 최후의 토론을 악한 유데아인들과 성전기둥 사이에서 벌리게 되었읍니다.
유데아인들은 끝끝내 진리에 대항하였고 주는 어디까지나 겸손하셨읍니다 불신(不信)의 유데아인들을 조금이라도 깨우쳐 보시려고 직접 그들의 생각에 호소하시며 『너희중에 누가 나더러 죄있다고 증거를 대겠느냐?』고, 특히 거짓말한 적이 있더냐고 묻습니다.
다들 한마디도 대답 못하고 가만히 있으니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거늘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고 책망하셨읍니다.
만일 저희가 천주의 아들이었다면 죄있는 자를 미워했을 터인데. 죄없는 주를 미워했으니 잘못이었읍니다. 특히 『나는 천주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듣기가 싫어서 주를 미워했으니 그들이 천주의 아들일 수는 없었읍니다. 아무도 죄없다고 말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었읍니다. 털끝만치도 허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말해도 듣지 않는 그들을 완전한 삼단론법으로 핍박했읍니다. 대전제(大前提)로 『천주의 사람은 천주의 말씀을 듣는다.』고 내세우고 『너희는 천주의 사람이 아니라』고 소전제(小前提)를 이은다음 『너희가 천주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결론을 지었읍니다. 그들은 천주로부터 나왔고 또한 천주로부터 나오지 않았읍니다. 본성은 천주로부터 받았지만 죄악은 마귀한테 얻었읍니다. 그 죄악 때문에 천주의 자식으로 불리우지 못하고 있읍니다. 그러니 단순히 죄악 때문에 천주로부터 안나왓다는 것이 아니올씨다. 누구나 다 죄를 갖고 있으니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천주의 사람이 아니라고 책망을 듣게 되었나 하면 저들은 자기를 죄악에서 해방시켜 줄 신앙을 남보다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천주의 말씀을 들어야만 천주의 사람이 되는데, 허다한 사람중 어떤이는 육신의 귀로도 듣지 않으려 하고, 어떤 이는 육신의 귀로는 듣되 마음의 귀로는 듣기 싫어하고 또 어떤 이는 몸과 마음의 귀로 듣지만 듣고나서 실천하지 않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저희들의 잘못이 드러나니 창피도 하고 화도 나서 무턱대고 『우리가 너더러 사마리아인이요, 부마하였다. 한 말이 어찌 잘한 말이 아니리오.』하고 모욕했읍니다. 사마리아인은 십지족(十之族)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리어 간 틈을 타서 이스라엘국에 몰려 들어온 교양없는 이방인이요, 부활도 영생도 믿지 않던 인간들이니 부활과 영생을 역설하시던 그리스도께서는 이만저만한 모욕이 아니었읍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자기 생활과 자기를 위한 성부의 역할로서 반박을 하셨으니 성경에 『나는 부마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성부를 존경하거늘 너희는 나를 능욕하는 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되 구하여 주시고 판단하여 주실 자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경고하시되 『나 진실히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 누 만일 내 말을 준행하면 영원히 죽음을 당치 않으리라.』고 타일러 주셨읍니다.
그들을 가르치시거나 그들의 교만을 문책하실 때는 엄격하셨지만 당신이 수모(受侮)를 받으실 적에는 인내하셨읍니다. 다만 사실을 부인하면 진리에 어긋나니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참을 수 없어서 간단히 『나는 부마한 자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셨읍니다. 악한 모욕에 대하여 악한 말씀을 쓰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아니라면 그것도 밝혀야 진리에 맞을게 아닌가 생각되지만 맞는점도 있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인하지 아니하셨읍니다. 성 바오로 보다 더 만사(萬事)에 만사가 되고자 하신 그리스도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원하셨고 착한 목자되기도 원하신 바 있으니 사마리아인이라고 조롱하여도 대답이 없었읍니다.
죄를 지으면 마귀가 붙어 부마자가 되는 법인데 조금도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는 거리낌 없이 나는 부마자가 아니라고 밝히심으로써 이유없이 조롱하시는 사람들이야말로 부마한 자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성부를 존경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활이었읍니다. 성자의 영광을 구해주시고 판단해 주시는 것이 성부의 역할이었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를 존경하시니 과연 부마하지는 않았읍니다. 천주 성부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해 주시고 판단해 주시니 주는 부마자가 아니었읍니다. 부마하지 않았다 하심으로써 저들의 존경을 받으시려고는 안했읍니다.
진실로 성부를 존경하였으니 천주께서 멸시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존경하시려 않으셨고, 성부께서 원하시고 좋아하시면 무엇이든지 좋아하시고 존경하셨읍니다. 따라서 천주의 뜻을 어기고 거짓말하고, 사람을 죽이려는 유데아인들을 주는 용납 못했읍니다. 주는 이엃게 성부를 현양학시고 존경하셨는데 유데아인들은 주를 존경하지 않았읍니다.
주께서 조롱 받으실 때 참으셨으니 자기 영광을 스스로 구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서 수모를 받을 때에 참지 못하면 우리 영광을 스스로 구하는 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하셨고, 또 위대하셨읍니다. 유데아인들은 교만하여 진리에 대항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겸손해 하실수록 분노했읍니다. 참다 못해 대꾸를 하다가 종내는 사리에 맞지도 않는 말을 하게 됐읍니다. 교만과 분노로 인한 것입니다. 조롱과 능욕으로도 분노를 풀지 못해 마침내는 돌을 잡아들게 되었읍니다. 무섭게 화가난 것입니다.
저희들이 누구길래 이렇게 분노할 수 있겠읍니까?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인 저들에게 수모를 받으싣니, 이건 정말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읍니다. 가르쳐 주시는 것만도 황송하고 고마워 침이 마르도록 감사해도 모자랄 터인데 대답을 함부로 하고 모욕을 삼가지 않고 돌로 쳐 죽이려고 달려드니 교만하기 짝이 없었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릅뜨고 바라보는 그들의 눈을 빼고, 모욕하는 혀를 자르고 돌을 쥔 손을 꺾어 버리실 수 있었지만 인내하셨읍니다. 겸손하셨읍니다. 눈도 부릅뜨지 않으시고 소리도 높이지 않으시고 양선(良善) 행하셨읍니다. 돌을 들고 치려 하니 몸을 감추시고 성전에서 나와 피하셨읍니다. 조물주가 피조물을 피하신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겸손해서 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하셨지만 위대하셨읍니다. 아바람도 죽고 다른 선지자도 죽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모르심은 물론, 그 말씀만 믿으면 누구든지 죽지 않게 하시니 위대하십니다.
주는 오십세가 못되셨지만 아바람이 나기전에 계셨으니 누구보다도 위대하십니다. 위대하셨기 때문에 아바람이 그의 날을 보려고 간절히 원하다가 보고 이에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생명권을 가진 위대하신 주를 따라가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교만해서는 주를 따를 수 없읍니다. 겸손하신 주께서 교만한 사람들을 피해 몸을 감추어 버리셨으니 찾을 길 없읍니다. 비참하게 피하셨지만 교만한 유데아인들은 그저 버려두지는 않으셨읍니다.
『너희들은 내가 가는 곳을 모르리라』는 엄한 말씀을 남겨 놓으셨읍니다.
찾으래도 찾지 못합니다. 및이신 그를 못찾으면 어둠 속에서만 머물게 됩니다. 즉 지옥에 내려진다는 말입니다. 교만의 탓으로.
盧景三 神父(꼰벤뚜알 성프란치스꼬회 · 대구 범어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