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5) 기도하는 기계문명
김치 애호가에 요긴한 껌
닭국이 기계속서 우루루
24시간 「고해」주는 뉴욕 번화가 성당
발행일1964-03-15 [제414호, 3면]
외출할 예약이 없는 저녁때에 한해 김치는 먹기마련이다.
아무데도 안나갈 생각으로 실컷 김치를 먹고 난 뒤 시름에 못이겨 극장에라도 가려면 내 자신이 풍기는 김치 냄새에 먼저 기가 질린다.
이런때 몸비 편리한 것이 껌이다.
입속에 머물러 있는 김치의 잔재를 씻어내 주어 좋고, 또 그것을 사기 위해 김치냄새에 예민한 미국상인과 흥정할 필요조차 없어 더욱 좋다.
1점만 기계에 넣으면 껌이 한개가 튀어나온다. 세계적인 공정가격 5전까리 껌 한곽도 기계에 돈만 넣으면 튀어나온다.
김치 애호인에겐 어지간히 편리한 껌이며 그 기계다. 얼굴하나 찡그리지지 않고 껌만 팔면 된다. 「다임」(10전)을 넣으면 묵묵히 거스름 돈하고, 5전짜리 껌 한곽을 손님에게 내 주곤 한다.
사람도 부지런한데 기계까지 이렇게 부지런히 장사를 하는 것이 미국이다.
한번은 아침도 못먹고 비행장엘 갔다. 너무 바쁘게 구는 바람에 「커피」 한잔도 못마셨다. 자동판매기계 앞에 가서 보니 갖가지 「스프」와 음료수를 판다고 했다. 닭고기국을 판다기에 돈을 기계에 넣었다. 그랬더니 종이 「컾」이 덜커덕 나오더니 그 위에서 우스스 무슨 가루가 떨어지고 뒤이어 더운물이 쏟아진다. 꼭 한 「컾」이 되니 자동적으로 「스톱」이다. 호기심에 찬 이 촌놈은 신기한 표정으로 이 닭고기국물을 음미할 수가 있었다. 미국의 질서는 기계에 의해 조정되는 것처럼 착각될 정도였다.
「뉴욕」 에서 「사브웨이」(지하철)를 탈 때도 개찰원이 따로 없다. 선박의 운전 「핸들」같은 십자형의 나무가 개찰구를 가로 막고 있다.
여기다 「토우큰」(온주고 사는 승차동전)을 집어 넣으면 가로 막힌 십자형의 「핸들」 같은게 열린다.
구라파보다 이같은 자동기계들은 더 많이 실생활에 활용되는 듯 싶었다.
기계는 확실히 사회생활을 더욱 윤택케하고 능률을 올리자는데 그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점에 있어서는 기계문명의 소음이 순수한 인간의 정서세계를 좀먹는듯한 느낌조차도 갖게한다.
조선 「호텔」같은 건물이 도시계획에 걸렸다고 해서 대여섯명이 거대한 기계를 갖고 와서는 며칠만에 헐어치우는 것도 봤다.
기계문명의 자랑을 감상하기에 앞서 『한국 같으면 인류 「빌딩」일텐데 쯧쯧』 혀를 차면서 가난한 백성의 궁상을 떨기조차했다.
영국의 러스킨씨는 말하기를 『기계는 생활의 한계를 확대시키기 커녕 도리어 게으름의 분야를 증대시킬 뿐이다.』라고 기계문명의 발달을 비꼬았지만 신라시대때의우리백성의 생활양식과 조금도 다름없는 소위 전근대적인 우리의 생활형편에서 본다면 기계문명이 자꾸 뒤 떨어지고 있다는 열등의식 때문에 오히려 게으름의 분야가 증대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뉴욕 이스트」 46가엔가-유엔본부로 가는 번화한 길목에 「아그네스」성당이 있다.
조배하러 들어갔더니 미사가 진행중인 것도 아닌데 성체조배자가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양벽에 잇달아 고해틀이 시설되어있고 제대 한가운데는 성체를 준비한 신부님이 영성체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특색이었다.
24시간동안 고해성사 볼 신자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이 성당-.
그런데 여기에도 기계문명의 잇점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엇다. 장궤틀 안에 신부님이 앉아계시면 문비깥의 파란불이 켜져있다. 10여개 되는 고해틀 중에 파란불이 켜진 곳에 들어가면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 교우가 그 안에 들어가 장궤를 하면 또 전기가 켜진다. 밖에서 빨간불이 켜져있으면 교우가 지금 고해를 보고 있는 중이라는 표지가 되는 것이다.
「맨하탄」에서 배를 타고 30분 가면 「스테이트 아일랜드」란 섬에 이른다.
이곳에는 「로마」에서 공부하고 오신 김창렬 신부님이 계셨다. 김신부님이 계시는 본당엘 가서 성사를 볼 심산이었다. 본당에 계신 신부님이 총동원되어 성사를 주는 부활전전날이었다.
성당 안에는 이곳저곳에 고해받기 위한 착한 죄인들의 행렬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러나 김신부가 계시는 고해틀이 어떤 곳인지 곧 알 수가 있었다.
고해를 정문 앞에 고해 주는 신부님의 문패가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전차운전수가 자기의 운전사 번호를 운전할 때 게시하는 방법으로 표시해 놓은 것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신부님께 고해를 볼 수 있도록 한 세심한 구상이었다.
실상 고해는 보고싶은 신부 앞에서 언제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겠지 하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감탄을 해보는 것이었다.
이같은 시설은 반드시 돈이 많은 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데-
기계문명이 아무리 발달돼도 천주님과의 교통이 무디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들은 천주님과의 정신교통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서서히 검토해보는 중인지도 모른다.
뉴우턴 말마따나 『망원경으로 몇천만리 밖 먼 곳을 바라다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천주께 고요히 기도하는 시간에는 그보다 더 먼 하늘나라를 볼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기계문명의 어지러움 속에도 기도하는 미국의 자세를 여러 점에서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