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시보」에 3회에 걸쳐 발표된윤형중 신부님의 전교설계도를 나는 매번 「시보」를 손에 들기가 바쁘게 단숨에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으며, 신부님의 여러가지 시대를 통찰하신 고견(高見)에 동감하는 동시에 만강의 찬사를 드리는 바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있듯이 그처럼 많은 환영을 받고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던 신부님의 교리강좌가 갑자기 중단되는 동시에 신부님의 전교설계도가 계획만 세워지고 중도에서 찢어지게 된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우리 한국에는 특히 지식인들을 위하여 가톨릭사상운동이 시급히 또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우리 한민족은 약 일세기전부터 급속도로 밀어 닥친 구미제국의 유물론적 과학문명으로 인하여 또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잃고 또 생활철학(生活哲學) 즉 생활이념(生活理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신라시대에는 불교정신이 우리국민생활을 완전히 지배했으며 이조(李朝)시대에는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우리민족의 생활이념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불교와 유교가 크게 쇠퇴하여 생활이념으로서의 종교가 아닐뿐 아니라 국민생활에 주는 감화력을 상실하고 불교나 유교의 4월초파일 불공 석존제 같은 연중행사가 한가지 연중생활풍속화 된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생활 철학을 가지지 못한 우리민족은 무슨 정신적인 공허감(空虛感) 허탈감(虛脫感)을 절감하고 그 빈자리를 메워보려는 움직임이 농후하다. 육체적 물질적 향락에만 사로잡히는 듯한 반면에 『이래서는 안되겠다』 『마음의 심주(心柱)가 될 수 있는 무슨 정신적인 생활원칙을 가져야 되겠다』는 마음의 움직이이 움트고 있음은 실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요즈음 특히 서울서 저명인사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가톨릭에 입교한 것이 그 한가지 좋은 예이며 연애영화 연애소설 같은 향락적인 저속한 것을 좋아하는 대중적 경향이 있는 반면에 「벤허」와 같은 반(半)종교영화들을 크게 환영하는 것이라든지 가톨릭교리강좌에 많은 청강생들이 모여드는 것 등으로 현재 한국청년들의 사상의 조류를 알 수 있다.
이런 좋은 시점(時点)에 물실호기(勿失好機)하고 각 중요도시마다 많은 가톨릭 「센타」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가톨릭사상운동을 전개함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 누구에게든지 충분히 납득되고도 남을 일이다.
이 운동에 사용할 비용을 걱정할지 모르겠으나 간접적인 우회(迂廻) 전교방법인 병원건설이나 거대한 교육기관 설립에 소요되는 자금에 비하면 극히 적은 자금으로 교회발전에 더많은 수확을 올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좋은 찬스를 놓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우리들의 양심적 책임문제라고도 하겠다.
현 정부에서 부르짖는 인간개조(人間改造)는 구호만으로는 될 수 없다. 철학적 생활이념을 주지않고 소위 국민운동으로도 인간개조는 아니된다.
인류역사에 있어 전무후무로 정신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과 감화를 준 분들은 철학가들도 아니요 정치가들도 아니요 「석가모니」 「공자」 「예수」님 같은 종교가들이다.
학교에서 도덕강의만으로서 청소년들의 덕육(德育)교육은 안된다. 참다운 인격함양은 오직 실천적인 신앙으로서 종교의 생활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아무리 학교교단에서 도덕시간에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부지런하라』 『근면하라』 『애국하라』고 떠들어대왔자 하기들의 개인의 인생관도 생활이념도 확립되지 아니한 선생들에게 학생들이 『당신들은 얼머나 부지런하오』 『얼마나 근면하오』하고 반문하면 말문이 막히고 말 것이 아닌가?
그때문에 현 학교는 인격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고 지식전달에 불과하며 학교의 도덕시간은 덕육교육이 아니요, 점수를 따기위한 학생들의 지식경쟁에 불과하다.
현 교육시책으로서는 학생들의 인간개조나, 덕육 교육은 고사하고 미구에 청소년들의 앞길에 정신적 위기가 올 것이 두렵다. 현재도 벌써 그런 징조가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종교, 즉 신앙생활만이 인간개조의 유일한 길이요 방법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석가모니」나 「공자」의 교훈은 힘이 있다. 자기들의 생활철학을 위하여 갖은 고초를 겪고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이론만이 아니고 실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나는 길이요 생명이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천주성자이신 영원한 진리 자체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들의 정신에 주는 감화력은 절대(絶大)한 것이다.
사람들의 삶에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데 「예수님」의 복음의 교훈보다 더 힘있고 효과적인 것은 절대로 없음을 우리는 단언한다.
정치만능은 금물(禁物)이다. 현재 한국민은 80「퍼센트」 이상이 생활이념이 없는 무종교자들이다. 하루 속히 종교운동으로 국민들의 마음의 정화를 이룩해야 할 때는 왔다.
국민 각자가 자기 스스로의 할 일을 못하고 국민 거의 전부가 정치 대상이 되고 경찰 대상이 되어서는 아무리 훌륭한 정치도 또 경찰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 아닌가?
국민 각자가 자기 스스로의 할 일을 못하고 국민 거의 전부가 정치 대상이 되고 경찰대상이 되어서는 아무리 훌륭한 정치도 또 경찰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 아닌가
국민들의마음의 자세가 전연 정돈되어 있지 않고 있는 이런 상태로는 아무리 훌륭한 대정치가의 힘도 무력하기 마련일 것이다.
현재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6십만의 신도를 자랑하고 있지마는 전체국민수에 비하여 아직도 너무나 적은 숫자라 아니할 수 없으며 2백년 한국교회사의 결실로 간주할 때 마음에 섭섭한 미족(未足)감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추세와 국민들의 정신의 움직임을 적절히 파악하여 더욱더 적극적인 시대가 요청하는 전교운동을 전개한다면 훨씬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줄로 확신하는 바이다.
신부들을 양성하여 본당만 하나씩 맡기면 만사는 다 잘되려니 하는 전교방법은 너무나 고태의연한 방법으로서 좀더 한국의 청년들과 지식층을 움직일 수 있는 적극적인 전교대책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본다.
특히 한가지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전교방법의 큰 실책은 가톨릭사상의 근본이요 심장이요 생명이요 영혼인 성서보급을 지금까지 극히 등한시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 측의 전교방법의 가장 훌륭하고 선견지명의 한가지는 그들의 가장 열렬한 성서보급인 것으로 본다.
「프로테스탄」 형제들의 가정에는 적어도 한두권의 성서가 없는 가정은 없을 줄로 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현실로서는 수백세대의 가톨릭 가정을 포옹하고 있는 본당에서라도 한권의 성서를 비치하고 있는 가톨릭가정이 몇이나 되겠는가? 실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총사령관 되시는 주교님들은 지금이라도 모든 교회사업들 중에도 우선적으로 또 대내대외 대대적으로 적극 성서보급에 힘쓰는 것이 급선무로 알고 이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사업에 적절한 대책이 있으시기를 공손히 진언하는 바이다.
박동준 신부(釜山 東萊溫泉洞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