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꽂이, 한 두 송이로도 周圍(주위)를 美化(미화)
발행일1963-09-08 [제390호, 4면]
한 묶음의 꽃, 한 줄기 나무가지를 꽂는데도 미리 와 정성을 드리는데 따라 우리는 그윽한 정서를 살려 주위를 미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그러한 마음씨의 결여로 아무런 느낌이나 _취미를 드러내는 수는 없는지. 꽃꽂이는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때때로 즐거움과 감탄을 맞게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는 사철 권할 수 없는 장식이 되어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꽃꽂이는 꽃이나 열매가지 같은 소재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잘 살리는 그릇과 놓여질 환경에다 이러한 것을 조화시켜 아름답게 나타내려는 마음씨 이 세 가지의 결합이라 할 수 있읍니다.
첫째 꽃꽂이에서는 완성된 후에 나타난 「화형(花形)」이 어떠한 재미있고 기발한 모습일지라도 그것은 평형(平衡)된 형에서 이루어진 것일 것입니다. 이 균형미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색의 조화입니다. 아름다운 「색조(色調)」를 나타내려면 첫째 화재(花材)의 빛갈, 그릇의 아름다움 마지막으로 놓여질 「환경」과의 색채의 조화, 이 삼자가 조화됨으로써 꽃꽂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가장 초보적인 기본 방법을 몇 가지 들고 응용키로 합시다.
▲줄기와 가지를 끊을 때
①가위질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풀이나 엷은 줄기를 끊을 때는 가위 끝을 써서 줄기를 직각으로 끊는다. ②나무가지(혹은 굵은 풀줄기)는 가위 안쪽으로 깊숙이 넣고 비스듬히 끊는다.
▲ 花材의 尺度
첫째 화형을 정하고 그리고 주지(主枝)를 골라낸다. 세 개의 줄기가 중심(主枝, 外枝, 妙枝)이 되어 화형의 전체적인 형체를 이룬다. 주지의 척도는 꽃그릇의 척도에 기준해서 잴 것이다. (그릇의 척도는 「그릇 주둥이(口)의 직경+높이」) 주지의 길이는 그릇과 같은 척수 혹은 1.5배 혹은 2배로 되는데 이것은 작품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외지와 묘지는 주지에 응해서 적당히.
▲ 굽히기=완성된 후 보아서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굽힘」과 「마디」를 쓴 것이 꽃꽂이의 형태다. 나무를 굽히고 싶은 부분을 양손엔 생략했으나 마지막으로 꽃 두송이(계절에 따라 다른 꽃 이즘은 따리아, 금잔화같이 작은거면 서너송이)를 높고 낮게 그릇 언저리를 가리듯 얕으막하게 곁드린다.
▲小型 꽃꽂이(미니아트으로)
콩알같이 작은 예쁜 꽃꽂이로서 꽃 한송이 꽃잎 하나 가지 한 끝 열매 한 가지같은 꽃잎부를 깜직하고 귀여운 맛과 꽃의 국부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미니아트으로」의 기초적 성격입니다. 화장병 마개 향수병 찻잔같은 여성들 둘레에 있는 무심한 물건이 변해 뜻밖에 예쁜 꽃그릇으로 나타납니다. 적으면 새끼 손가락 끝만한 것으로부터 커야 7내지 8「센치」의 크기로 합니다. 이것은 한 개도 좋지만 형형색색으로 여러 개를 만들어 인형처럼 진열해도 재미있지요. 그러나 어디나 물은 담아야 합니다.
이밖에 꽃꽂이에는 좋은 그릇이면 더욱 좋고 돈 만이 안 들여도 이즘 시장에 나오는 각가지 형색의 고운 나이롱 바구니도 잘 쓰는데 따라 멋진 꽃그릇이 되지 않을까요. 오라잖아 들에는 코스모스 들국화 갈대 멍게덩굴 탱자까지 이런 멋지고 주인 없는 꽃들이 반발하겠지요.
■ 祭臺 精誠되이 꾸며야
제대는 성당 안에서 최고의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것은 축성으로써 교회인 건물 속에 산돌인 영세자들과 하나이 되는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대의 장식은 정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꽃을 꾸미는데 있어서도 조화 등 모든 위조를 피해야 합니다. 제대는 단순하게 장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첨례날 병에 신선(新鮮)한 꽃송이 몇 개를 제대 위에 들 수 있읍니다. 이 습관은 비교적 근대에 시작되었나 봅니다. 예컨대 16세기 불란서에서는 놀랄 일이였읍니다. 전례서에 「VASCULACUM FLOSCULIS」(작은 꽃을 작은 병에)를 허가할 수 있다고 표시되어 있읍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법의 정신을 잘 파악해야 되겠읍니다.
병은 십자가와 성해와 촛대같이 제대를 꾸미기 위하여 쓰는 부분처럼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병은 꽃을 위해서만 있는 것입니다. 병은 가능한한 따로 있어야 하고 물론 고상한 모양과 적당한 재료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병은 꽃 없이 제대 위에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너무 빽빽하게 다발로 묶여있어서 앙니되고 따로된 입사귀로 둘러싸여 있어야 합니다. 제대 주위도 깨끗해야 합니다.
푸른 식물의 혼잡은 지성소의 장중성과 결백을 즉 제대를 둘러싸야 할 거룩한 공간을 해칩니다. 전체가 취미 있게 배치되어 있도록 노력해야겠읍니다. 「STUDIOSE ORN ATA」(잘 연구해서 꾸며진)라고 전례서는 말합니다. 신앙생활과 예술과의 관계를 우리는 실제적인 견지에서 고찰합시다. 즉 우리 일반 신자로서의 생활을 예술적 감상의 측면에서 생각합시다. 현재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에술은 얼마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읍니까.
우리는 제대에 꽃을 꾸미는데 있어서도 너무나 예술에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만 예술적으로 제대를 미화하기를 힘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될 수 있는대로 신앙생활에 상응한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한 한에 있어 미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전례서의 「텍스트」는 거룩한 물건에 당연히 바칠 존경과 함께 화분에 심은 식물을 제외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한 두 송이 꽃이나 혹 꽃이 핀 가지를 늘신한 모양의 수정으로 된 병 등에 꽂는 것입니다. 자연 꽃을 분비 못할 때는 비단으로 만든 가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전례서는 말합니다만 자기(자器)나 금속이나 종이로 만든 꽃은 명확히 금합니다. 우리는 성당에 미를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미주의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설령 꽃이 더럽고 난잡하더라도 참 신앙 있는 자에게 무슨 장애가 되겠읍니까. 그러나 성당은 천주의 집입니다. 그것은 되도록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읍니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고 질서의 문란이요 쓸데 없는 장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