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敎會議(주교회의)에 期待(기대) - 焦眉(초미)의 典禮(전례)운동
目標(목표)는 단 한가지
段階的(단계적)으로 推進(추진)해가야
발행일1964-03-22 [제415호, 1면]
어떠한 마음씨로 거룩한 미사성제에 참례하는가?
통회하는 마음으로 참례한다고 한다.
혹은 깨끗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다고도 하고, 혹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은다고도 한다. 십인십색이지만 모두 옳고 또 공통인수(共通因數)가 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완전히 의식적으로 또한 능동적으로 참례하고 있는 가라고 물으면, 상당히 열심한 신자라도 선뜻 대답을 못한다. 하긴 못하는 것이 당연할른지도 모른다.
필자는 언젠가 우연한 자리에서 어느 교우가 『…세세에 생활하시고 왕하시나이다』의 「왕하시다(다스리시다, 군림하시다)」를 「오시다(枉臨)」라는 뜻으로, 또 미사복음의 첫머리마다 나오는 『유시(維時)에(그때에, 그 무렵)』를 『타일러 가르치는 말씀(諭示)』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 일이 있다. 그 교우는 나이도 지긋하고 대학가지 나온 분이었다. 그분은 차라리 무식(?)했더라면, 왕림(枉臨)이니 유시(諭示)니 하는 어휘를 동원 안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 신자들이 미사경문을 어느정도 이해해왔는가를 짐작케 하는 예(例)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오해가 있더라도 미사중 열심히 경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유효한 참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숫제 빈손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 빈손 「구룹」에는 두가지 형(型)이 있으니 하나는 무언관람형(無言觀覽型)이요 또하나는 이상정성형(異常精誠型)이다.
무언관람형은 주일이나 큰 축일의 미사를 궐하면 대죄가 된다는 계률에 끌려 마지못해 느지막이 나타나서 무슨 연극이라도 구셩하듯 멀거니 미사를 구경하다가 마지막 복음때 모두 일어서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미사성제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외면하는 행위이다.
이런 사람들과는 달리 매우 열심한(?)듯 하면서도 역시 그릇된, 참례를 하는 사람들 곧 이상정성형은 사제가 층하경을 마치고 제대로 올라가기가 무섭게, 여보라는 듯이 묵주를 꺼내들고 묵주신공을 시작한다. 사제가 무슨 축문을 외우거나 성가대가 무슨 노래를 하거나, 서간경복음의 내용이 어떻게 되었거나 아랑곳 없다. 무슨 신공을 드리는 정성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영성체때는 빠질새라 앞장을 선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영성체를 중요시 한다. 또 사실 중요시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천주께서 베푸시는 잔치요, 이 세상에 그보다 더 거룩한 잔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에 참여하려면 먼저 천주께 예물을 바쳐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봉헌해야 하는 것이다. 연후에 우리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합당한 봉헌과 맞갖은 준비없이 주의 몸을 배령하는 것은 제사는 드리지 않고 젯밥만 욕심사납게 받아먹는 격이다.
이상 말한 몇가지 예에서 다음과 같은 반성이 귀납(歸納)된다.
첫째, 우리는 예전 경문의 보다 정확하고 보다 나은 번역을 위하여 좀더 과감한 노력을 경주(傾注)해왔어야 했다.
둘째, 사제들은 예전집전에 있어 단순히 유효하고 가합한 집전을 규정지은 법규의 준수뿐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알고 능동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이에 참여하도록 좀더 의무적으로 보살폈어야 했다.
셋째, 신자들은 천주의 성총을 헛도이 받지 않도록 좀더 열의(熱意)를 가지고 천주의 성총에 협력했어야 했다.
『모든 예전집행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또 그분의 몸 곧 성교회의 행위인 까닭에 다른 모든 행위를 초월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그밖의 성교회의 행위는 어느것도 같은 명목에 의해서 또 같은 정도로 예전의 효과에 필적할 수 없다.』 (예전에 관한 교황령 7)
이렇듯 예저은 존엄하고 지상적(至上的)인 것이기 때문에,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사목적예전운동이 성교회 안에서 더욱 활발히 촉구되기를 요구하면서, 제일먼저 고려되어야 할 목표는 모든 신자들의 『완전하고 능동적임 참례』라고 했다.
이것은 참으로 실감되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수십년 전부터 자발적으로 전례운동을 해왔고, 또 그 성과를 이번 공의회에 반영시켜 결실을 보게 한 구미 선진 각국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이 과제가 실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선진 각구에서는 이번 교황령을 계기로 지금까지도 어지간히 노력해온 바를 앞으로는 더욱 완전하게 더욱 능동적으로 실천한다는 본격성(本格性)과 동일성과, 권위를 띠우겠지만,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우리의 실정은 오히려 그들의 지금의 여건(與件)을 갖추기에도 요원한 듯한 후진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교지방으로서 밟아야 했던 험난한 노정(路程), 근년에 급격한 교세(敎勢) 팽창, 이를 따르지 못하는 성직자 수의 부족 등 외적(外的) 내적(內的) 상당한 이유들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 오늘날만큼 성장한 우리의 교회사는 다른나라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고, 오히려 자랑해야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도 갖가지 어려움이 가중하면 가중했지 결코 수월해질 가망은 없다. 한편 교황령은 우리에게 초미(焦眉)의 과제들을 부하(負荷)하고 있다.
성직자 평신도를 막론하고 비상한 분발이 요구되는 소이(所以)가 여기에 있다.
지금가지도 많은 일을 해왔지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더욱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제일 먼저 고려되어야 할 목표는 오직 한가지 『모든 신자들의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예』이다.
앞으로 전례운동은 이 목표를 위해서 단계적(段階的)으로 연구되고, 성안(成案)되고, 조직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래에의 발전은 과거에의 올바른 반성에서 기약된다. 우리의 예전운동도 착수에 앞서 과거와 현재에 대하 철저한 검토와 솔직한 반성이 선행해야만 소기의 목표를 향해 착실한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뭐 지금까지 잘 했다』느니, 『뜻만 틀리지 않으면 된다』느니, 『정성만 있으면 된다』느니 하는 구실과 불평과 반발이 나오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