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11) 領洗(영세)하러 平壤(평양)서 서울까지 간 유씨
背敎者의 棍杖 맞고
被逮豫期하며 미리 準備
발행일1963-09-15 [제391호, 3면]
베드루.유정률은 평양 지방의 율리면 탑현리(일명 논재)에서 출생하였다. 조실부모하여 혼자서 짚신을 엮어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1864년경 상경(上京)하여 장주교에게서 영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영세하기 전 그는 자기에게 순명하지 않는다 하여 아내를 몹시 매질하였지만 영세 후 그것을 보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신꼬리로 피나게 매질하며 말하기를 『만일 내가 내 아내에게 준 매를 생각한다면 이제 내 몸을 괴롭힌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크게 감동되는 그 아내도 좋은 표양을 따르게 되었다.
순교를 위한 준비도 갖추어진 1866년 정월 초이튿날(양력 2월16일) 친척집에 세배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고을의 거리는 멀지 않으나 지금 떠나면 다시 돌아올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여 닥쳐올 일을 암시하고, 그날 저녁 고둔이라는 마을에 있는 공소에 가서 정원선시오와 함께 성경을 읽고 있다가 포졸과 군인에게 잡히어 관대한 포졸들의 눈을 피해 많은 교우들은 피신하고 유 베드루와 정회장 외 네 명이 그 다음날 평양 감영에 잡혀 장평청 감옥에 갇혔다. 이미 잡혀온 1백여 명의 교우와 함께 문초받았고 차례로 심문받았으나 대부분의 교우들은 배교하였고 관장은 배교한 교우로 하여금 『이 악당들을 시켜 베드루가 죽을 때까지 치게 하라』하여 한 사람 세 대씩 삼백여 대를 쳐 장하(杖下)에 순교하니 잡혀간 다음날이며 때에 약 삼십세였다. 『시체를 헌겊으로 싸니 이상한 빛이 나더라』함은 제1증인 정창견의 이야기이고, 같이 잡혀간 교우를 시켜 대동강에 던지니, 베드루의 아내가 관장에게 돈을 주고 시체를 사서 사공이자 사돈이 되는 이를 시켜 시체를 건져 탑현리(논재)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