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18) 우정 ③
발행일1963-09-15 [제391호, 4면]
『동이 어머니, 사실을 얘기해주세요』
나는 마음이 바빠, 허두도 없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
『뭐?』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서 말야요?』
동이 어머니의 얼굴에는 달빛이 구름을 만난듯이 삭 그늘이 진다.
『동이 어머니는 아시죠? 아실거야?』
나는 물고 늘어지듯이 자꾸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니?』
동이 어머니는 차분하게, 조심스러이 말문을 연다.
『모두 나보고 한국사람 아니라고 하잖아요. 어떤 아이들은 양부인 종자라고까지 그러지 않아요? 우리 어머니가 양부인한건 아니죠?』
『아니구 말구 당치도 않은 소리다.』
분명한 태도로 부정을 한다. 안심이 되는 일변 다음 일이 더 불안스럽기도 했다.
『그럼 어떻게 된거야요?』
『아버지한테 물어봤니?』
『안 물어봤어요.』
『아버지한테 물어보렴!』
『아버지는 위선자니까, 바른말 안 하실꺼야요.』
『왜, 아버지를 위선자라고 하니?』
『위선자야요.…』
나는 집안에서의 탈을 벗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다. 어쩐지 마음이 좀 깨름하길래
『…근데 요새는 덜해요. 이제 내 방에 불도 넣게하고 지난번에 영어 웅변대회에 일등했다고 가죽가방도 주셨에요…』
하고 변호도 했다.
『아버지 흉은 밖에 나와서 보는게 아니야!』
동이 어머니는 오히려 나를 나무란다. 아버지를 지나치게 변호한 것 같애서 나는 어머니를 학대하던 얘기까지 꺼냈다. 표리가 부동한 그의 어두운 성격을 돋자리를 턴듯 탁탁 털어냈다. 실지보다 조금 과장한데가 있었지만 일부러 그냥 두었다.
『엄마, 그랬니?』
동이 어머니는 아연한듯한 표정을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얘기 안 했어요?』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는 얘기는 안 하시더라!』
『어머니가 양부인 했다고 아버지가 구박하신 것이 아닐까요!』
『너의 어머니는 깨끗한 분이다…』
『………』
이때 내 머리에는 한층 불안스런 예감이 밀려온다.
『줏어온 것이 아닐까?』
나는 얼핏 묻지를 못했다. 그렇다는 선고가 내릴까바 겁이 난다.
『아시는건 다 얘기해주어요?』
나는 불안에 떨리는 마음을 참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잘 아시지 내가 알턱이 있니?… 너의 출생이 어떻든간에 신경쓸건 없다. 예쁜 얼굴과 좋은 체격으로 태어난걸 감사하고 자랑으로 생각하렴. 남보다 머리도 좋게 태어났는데 무엇이 걱정이니?』
나는 동이 어머니의 말도 그런듯 했다.
소나기가 지난 뒤의 흩어지는 구름장모양 어둡던 내 마음은 훨씬 밝은 곳으로 트인다.
『아주머니 말 들으니까 좀 맘이 가벼워져요…』
『무겁게 생각할 것 없다』 나는 권하는대로 저녁을 얻어먹고 동이와 함께 만화책도 보다가 컴컴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늦게 돌아왔다고 욕을하던 아버지의 입은 동이네에 갔었다는 말을 듣자 금시 다물린다. 밥한끼라도 절약이 된 것을 계산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날밤 내 방에서 숙제를 할려고 책을 폈는데 기분은 다시 무거워진다. 무언지 모르게 내 앞길에는 불안한 덩어리가 뭉쳐있을건만 같다. 마침 아버지가 캬라멜을 한갑 들고 내 방에 들어왔다. 어쩌다 그는 캬라멜을 사들고 들어오는 습관이 있었다.
『옛다, 공부하면서 먹어라…』
그는 한 알을 빼고 남은 것은 갑채로 책상 위에 던진다.
『아버지 좀 물어볼게 있어요.』
캬라멜갑에 시선을 준채 나는 말했다.
『뭐냐?』
아버지는 내 옆에 앉는다.
『아이들이 나보고 양부인 종자라고 놀려요.』
『어떤 년이 그러더냐?』
『확실한걸 얘기해주세요?』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이렇다.…』
입속의 캬라멜을 한군데에 몰아넣고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말한다.
『…내가 어떤 미국 여자하고 연애가 되어… 너를 낳은 거다』 『…그 미국여자 이름은 뭐애요? 지금 어디 있어요?』 『이… 이름은 뭐라더라 메리라고 하던가? 해방 직후에 미국으로 갔다. 병을 앓아서 그 후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그 편지 지금도 있어요?』
『불태워 버렸다. 너는 멀쩡한 내딸이니까 조금도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어서 쓸데없는 새악 말고 공부나 해라!』
그는 얘기가 길어지는 것을 피하는듯이 건너방을 나가 버렸다.
나는 잠시 그런가하고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부인을 했다. 아버지는 영어를 통 모른다. 『땐큐』와 『애스』 이외에는 아는 단어가 없다. 『땐큐』와 『애스』로서 미국 여자와 연애될 리 만무하다.
새로 한시까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으나 버스를 기다릴 적부터 학교에 갈 기분이 안 난다.
타기는 했으나 늘 내리는 ㅇㅇ에서 내리지를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미도파 앞에서 내려서 명동을 지나 충무로 쪽으로 걸어갔다.
언젠가 한 번 간 일이 있는 ㅇㅇ명곡 감상실로 갔다.
그곳은 아침 아홉시부터 밤 여덟시까지 서양명곡을 틀어주는데 장내는 파란불로 장식이 되어 낮이라도 컴컴으레 하니,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여학생복을 감추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곡목은 베토벤의 제9교향악이었다.
한시간쯤 지나니 몇 사람 없던 감상실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늘어갔다.
『미스양 아니요?』
누군지 내 뒤에 와서 나직히 말하는 남자소리가 난다. 처음엔 누군지 잘 몰랐다.
『김진호의 친구야요. 작년에 우이동에서 만난 일 있잖아요』
그리고 보니 벙글 웃는 얼굴에 기억이 있었다.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온 그 얼굴은 「미스타」 여드름이었다.
『알겠어요?』
『네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어두운 광선 덕분에 하늘의 별같이 총총하던 수탄 여드름의 그림자는 깨끗이 감추어져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니요』
『그럼 왜 이런데 왔어요!』
『웬만큼 좋아해요』
나는 긴말 하기가 귀찮아서 음악팬인척 했다.
『난 음악 좋아하는 미군 아이 때문에 왔지요?』
하며 하나 건너 뒤에 앉아있는 미군 청년을 턱으로 가리킨다.
미군은 싱긋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보냈다.
얼마 후에 쉬는 시간에 「미스터」 여드름은 내 몫까지 차를 시켜놓고 자기네 자리로 오라고 한다. 구지 사양할 것도 없어서 그 옆에 가서 차를 같이 마셨다.
「미스터」 여드름은 어디서 듣고 알았는지 미군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 여학생은 영어를 잘한다. 자기네 학교에서 열린 영어웅변대회에서 일등상을 탓다. 얼굴도 너의네 나라 사람같이 생기고 아름답지 않느냐 이름은 미스양이다!』
나는 「미스터」 여드름의 발음이 과히 좋지 않다고 생각하며, 듣고 있었다.
『내 이름은 딕슨, 알게되어 기쁘오!』
미군청년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다.
『내 이름은 이미 아셨을테니 다시 말하지 않겠어요』
나는 영어로 그에게 대답했다.
『너의 영어는 매우 유창하구나?』
미군 청년은 칭찬을 한다.
『나 영어 잘 못해요』
『아니야 발음이 정확해!』
이렇게 말하며 그는 자꾸 나에게 얘기를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