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귀사 편집국장으로부터 수제(首題)의 건에 관한 원고청탁이 있어 가톨릭출판의 필요가 어느때보다 절실한 이때 혹 독자 여러분의 참고가 될가하여 몇마디 적어보기로 한다.
먼저 번역을 하게된 원인(遠因)부터 말하자면 멀리 50년전으로 소급해서 말하게 된다.
본인이 수원농림학교(現 農大 前身)에 입학한 것이 바로 50년전인 1914년이었다.
전교생 120명중 내가 유일한 천주교 신자임을 알게되었다. 대다수가 무종교자요 「프로테스탄」신자가 4·5명 있을뿐 종교문제는 교내에서 별로 화제에 오른 일조차 없었다.
그러던중 서울서 유명한 설교자 현(玄) 목사가 수원 삼일교회(三一敎會)에 부흥운동차 내려와 연일연야 씨의 독특한 웅변으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현목사는 원래 웅변가로서 설교중에 독립사상을 교묘히 고취하여 젊은 학도들의 정열을 지극하고 항일(抗日)의식에 피끓게 하였다.
수원농림학생들은 너도 나도 현목사 설교를 듣고자 수십명씩 짝을 지어 예배당으로 내왕이 빈번하였다.
일제억압하의 울분도 풀겸, 허탈한 공허감(空虛感)에 신앙의 양식도 맛볼겸 감격과 흥분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학업도 제쳐놓다싶이하고 밤이면 설교 듣기, 새벽이면 산상기도로 수십명이 열광적 신자로 돌변하여 교내는 어느듯 「프로테스탄」 일색으로 뒤덮였다.
연일 화제가 현목사 설교의 예찬이요 그리스도복음의 토론이다. 그중에도 두드러진 지도자가 한사람 있었으니 그는 곧 나보다 한반 상급인 김모씨다. 그는 열성도 대단하려니와 일찍 성경공부를 철저히 한 분이라 교내 목사격으로 매일 기숙사 이방 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자연 천주교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상기가 되어 『천주교란 완고하고 미신적이고 부패한 사교라」하며 여지없이 매도(매倒)하고 조소(嘲笑)하는 것이다.
앞에서 듣고있던 학우들은 교내 유일한 천주교인인 내 얼굴을 주시하면서 __하곤 했다. 자아시(自兒時)로 천주교가 골수에 배인 나로서 천주교만이 옳다고 확신해왔던 내게는 청천벽력이었고 그지없이 놀랐다. 가는 분격을 참지못하여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였지만 그 김씨는 청산유수로 성경구절을 연상 인용하면서 「고린도 전서 몇장몇절」에 이런 말이 있지 않느냐 「골로새서 몇장몇절」에 이 말씀을 모르느냐 식으로, 또 이러이러한 부패사실이 있지 않느냐고 교회사의 사실(史實)을 들어 육박하는데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고린도전서」가 무엇이고 「골로새서」가 무엇인지 들어본 일도 읽어본 일도 없었고 더우기 교회사는 캄캄할 따름이라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때 우리 교회에 성경관계서적이라고는 「성경직해(聖經直解)」 밖에 없었고 (매주일 복음을 해석한 것) 호교관계(護敎關係)로는 「진교사패(眞敎四牌)」가 있었을 뿐이나마도 보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이 방면에 어둡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여지없는 부전참패(不戰慘敗)를 당하고 나서 내가 받은 정신적 타격이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가톨릭신앙에 대한 신뢰감만은 확고부동이었지만 너무나 교리와 교회사에 암매(暗昧) 했던 탓으로 한마디 대구도 못하고 병 속의 쓴잔만 마신 울분이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언간 나도 20세쯤 되고보니 우리교회 자체에 대한 나로서의 의문도 차차 머리를 들게되어 이에 대한 만족한 해답을 구해보려 했으나 적당한 서적도 없고 신부님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다른 성무에 바쁜 몸들이시라 개인지도의 시간적 여유조차 별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보아도 내 신념을 채우려면 외국으로 유학나가 외국 원문을 통한 광범위의 섭렵(涉獵)으로 마음껏 교리연구와 교회사연찬(硏鑽)에 정진해보겟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따라서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도미할 준비로 당시 유일한 영어학교인 YMCA 영어반에 통학하였었다. 마침 그때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총장 월쉬 쉰부가 아주전교실정을 시찰하러 중국 기타 및 나라를 역방하고 귀로에 한국에 들렀을 때 그분이 중국 상해 부호(富豪) 주씨의 아들형제를 대동하고 미국유학을 주선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망(羨望)을 금할 길 없어 가친께 나도 도미케 하여달라고 연일 강청을 계속하여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기미년(己未年) 3·1운동때라 일정하 한국청년의 도미유학을 허할리 만무하다. 그 익년인 1920년에 이르러 여권신청을 내고 몇달을 기다려도 종무소식이다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출급(出給)되어 그해 11월에 도미한 것이다.
미국에 도착하는대로 곧 「메리놀」 본부로 월쉬 총장신부를 찾아 내의(來意)를 고하고 지도를 청하였다. 그는 교회학교중 역사깊은 「맨하탄」대학으로 입학하기를 권장하면서 우선 예과에서 영어공부를 더하라 하며 우리 초대교황사절이 되실 방(方) 주교님이 교장으로 있던 「베나드」 소신학교에서 영어를 습득하도록 주선해 주셨다.
그익년 신학기 부터 「맨해탄」에 입학하여 필수과목으로 매일 1시간씩의 교리를 배우기는 하였으나 나는 따로 교리 · 교회사 · 호교학(護敎學) 등을 자급하면서 여러신부님께 개인지도를 청하여 거의 무제한질문으로 신부님들을 괴롭혔다. 하루는 월쉬 총장신부님과 기차여행을 동도할 기회가 있어 차중에서 「프로테스탄」의 오해를 풀어주는데는 어떤 책이 제일 좋으나고 문의하였더니 그분 말씀이 「교부들의 신앙」이면 그만이니 이것을 정독하여 보라. 또 「쾌스촌 빡스」도 매우 좋으니 이 두책만 철저히 공부하면 못대답할 것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나는 지체않고 이 두권을 구득하여 곧 탐독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알고싶던 모든 의문이 가장 조리정연하게 해설되어 지금까지의 모든 의문은 깨끗이 무산(霧散)되고 우리 교리를 명확히 자신있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르는 희열과 만족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계속)
張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