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읍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더음이 됩니까. 우리의 희망이 그로인해 지속됩니까. 우리의 애덕이 더욱 치열해집니까. 혹은 반대로 그것은 우리의 생활위에 아무런 반향도 없이 다만 이날을 우리에게 주는 외부적인 기쁨과 함께 지내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까?
종도들이 유다스의 후계자를 선출할 때 부활의 증인이 되는 자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읍니까 혹은 우리의 신앙이 힘을 잃고 그리스도의 존재의 이 중심신비에서 얻은 생활이 끊어지지나 아니했읍니까. 우리의 「그리스띠아니즘」은 무엇입니까. 몇가지 교리에 대한 지식 몇가지 계명에 대한 순종 그리스도와 성모와 성인들에게 대한 약간의 신심(信心)입니까? 이 모든 것이 가톨릭 생활의 본질적인 요소임에 틀림없읍니다. 그리스도 부활하시지 아니하시더라도 우리의 가톨릭적 생명에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이 어떻게 교리에 생명을 주고 울의 신앙의 긍정에 보탬이 되는지를 살펴봅시다.
①복음서 가운데 부활은 무엇을 뜻하고 있읍니까? 그것은 먼저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지고 계신 확실성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유데아인들의 배척, 「바리세이」들의 원한 종도들의 이해부족을 말하는 성경구절을 보고 주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갈바리아」산상에서 마지막 버림의 밤을 보내신 그리스도를 매정한 인류로부터 오해를 받은 희생물처첨 생각코저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일생에 이 고독이 있었읍니다. 반역이 끄칠줄 모르고 행사되었을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파괴의 힘이 그의 지상 운명에서 육신의 죽음으로 드러났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간의 무거운 죄를 당신 어깨에 질머지고 끝까지 이 운명을 이끌고 가신 것은 그에게 절망이 아니었읍니다.
그가 당신 제자들에게 닥쳐올 수난을 고하는 성경말씀 가운데 『삼일만에 그는 부활하리라』는 구절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스도에게 절망이란 추호만큼도 없었고 오히려 부활에 대한 확실한 긍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읍니다.
②부활은 교회의 생활이 중심입니다. 종도행전에서 종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설교하신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의 감격을 생활케 하는 한가지 확실한 것을 봅니다. 즉 『무덤에 있었던 자가 부활하셨다. 우리는 이 사정에 있어 증인이로라』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변케하였고 그들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의 뜻을 알게하였고 신자의 약한 신망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주었읍니다.
③바오로 종도에게도 마찬가지로 부활이 모든 힘을 주었읍니다. 그가 그 당시 알려진 세계에서 전한 복음은 바로 부활의 「메시지」였읍니다. 그는 예수를 무궁세에 생활하시는 자로 알게했고 신앙으로 그와 하나이 되는 이는 그로인해 재창조(再創造)된다는 것을 알게했읍니다. 그는 「마마스고」도상(途上)에서 그 힘을 입증했읍니다. 그리고 그가 지나가는 모든 도시에서 이 효력을 또한 입증했읍니다.
④그러면 우리를 위해서는 이 부활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부활은 첫째 한가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것은 또한 기쁜 날입니다. 「알렐루야」를 고하는 종소리와 「올간」의 장엄한 선율이 울릴 때 묻 선남선녀가 봄 옷차림으로 성당에 흘러가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오색이 영롱한 아침 양광이 쏟아지는 이 부활의 날은 기쁨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러다 가톨릭교리와 우리 개인신자생활 발전에 있어 부활이란 이 중심 사실이 흔히 올바른 위치에 있지 않을 수 있읍니다.
그럼 부활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부활 때 주님 안에 그때까지 숨어있었던 천주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났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 세상을 은총의 세상으로 재건했읍니다. 재창조의 힘이 교회 안에 작용했읍니다. 부활에 의거하지 않고 은총의 신비를 상기할 수 없읍니다. 은총 안에서 작용하는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함께 창조하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은총 안에 부활할 것이요 천상광명으로 빛나는 새 아담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힘, 은총의 이 찬란한 힘이 우리에게 그토록 위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유혹을 당할 수 있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고도 정직하고 성실하고 용감하고 곤란중에 서로 도울 줄 아는 사람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흔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겁한 양심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자의 윤리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성 바오로는 『사랑은 법의 완성이다』 했읍니다. 만일 법이 우리에게 생활의 구속(拘束)이요 거부라면 그것은 법이 아직 완전히 우리의 사랑 속에 들어가지 못한 탓이요 우리가 아직 「빠스가」의 광명으로 빛나지 못한 탓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합니다. 오내하면 오든 계명은 우리에게 천주의 영광과 그의 성성(聖性)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명이 우리에게 요구될 때 그것은 우리의 본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와 또 우리 자신에게 천주의 영광과 그의 성덕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축일을 우리가 근본적으로 재창조되지 않고 그냥 지내버려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와의 일치가운데 우리를 포옹하는 절대성실성이 무궁세에 왕하시는 주님께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가톨릭시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