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7) 고독을 이기는 무기 ②
교두보 노릇하며 미국 지키는 가톨릭
쫓겨난 「인간예비역」들 공원 벤취서 서성대고
발행일1964-03-29 [제416호, 3면]
『지나가는 미국인, 열두명 중의 한사람은 「노이로제」환자다』라는 정신의학계의 통계도 결코 우연한 것은 아닌상 싶다.
공원 「벤취」는 언제나 쓸쓸한 노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
「젊은 세대」한테 추방당한 「인간 예비역」들임에 틀림없다. 신문을 사들고 「뉴스」사진과 요란한 광고문을 훑어보다 「벤취」 위에서 곧잘 낮잠을 자기도 한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인가보죠』
『의지할 사람이 없다구요? 한국의 가족제도완 좀 다르죠. 그들 전부가 자식들이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자식한테 기대지 않고 국가의 사회보장제도란 훌륭한 시책에 의지하기 때문에 점점 그들은 가동능력이 없어지면서 더욱 외롭기 마련입니다.』 자식들에게 의지않고 「제도(制度)」에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급50불의 생활비를 사회보장제도로 타고있는 그들이기도 하다. 이 고독의 「벤취」 옆을 무심히 지나치는 젊은 행렬들의 표정도 있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되겠지』하고 공원 「벤취」에 앉은 노인들 속에서 먼 훗날의 자기 표정을 찾아보려 드는 젊은이가 그리 많은 것 같지도 않다.
미국시민들은 그저 바쁘기만 하다.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은 살지 못할 곳이다. 그들은 「먹고」 「즐기고」하는 「프로그람」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예순일흔의 할아버지까지도 노동전선의 지원병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엔죠이」란 말을 즐겨쓰는 그들이지만 미국의 서민층은 그들의 여가의 시간을 「텔레비전 챠넬」을 돌리는데 태반을 소모하고 있다. 단조한 「엔죠이」로 인성을 소모하는 군상이 꽤 많은 것 같다.
그 화려한 단조속에서 가끔 신문사회면을 떠들석하게 하는 가지가지 「사건」과 10대 소년들의 「우울한 화제」가 활기를 띠기도 한다.
나는 이같은 나대로의 「미국진단」을 하면서 나의 가난한 고독과 미국의 화려한 고독을 맞세워 놓고 「뉴욕」의 가을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커다란 미국이 그래도 건전한 질서 속에 회전되는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가톨릭의 기본정신이 미국의 저류(底流)를 흐르고 있는 때문이 아닌가?)
혼자 중얼거려도 본다. 흐려지기 쉬운 사회의 물결 밑바닥에 미국의 가톨릭은 「건전한 미국」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국 국민학교의 50% 이상은 수녀님들에 의해 교육되고 있거던…』 귀띰해주는 한국유학생의 말 속에도 나같은 생각이 내포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자꾸 「마음의 고향」을 신앙 속에서 찾으려는 모습이 고독한 미국인 가운데 점차 늘어간다고 들었다.
고독은 의지할 곳이 생김으로써 소멸될 수 있다. 나의 가난한 고독이 화려한 미국의 고독과 대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민주주의의 시범장(示範場)이기도 하고 쾌락주의의 원천지일수도 있는 미국에서 나는 약간의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박사의 「김대건 초상화」 오교수의 「목각의 십자가」 건전한 미국가톨릭인의 「경건」한 자세를 되새기면서 『고독을 격퇴하는 무기는 「신앙」밖에 없다』고 갓 철난 어린이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은 고독할 때 그 자신을 찾을 수 있다』한 쇼펭 하우어의 말이 일이있는가 몰라, 나는 나처럼 겪은 수많은 한국가톨릭 유학생들이 시낭을 자본삼아 미국의 공포(환경)와 싸워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은 고독이다. 어떠한 공포라도 함께 겪는 사람이 있으면 견디어 낼 수 있으나, 고독은 죽음과 같다. 』(깐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