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43) 편지 ①
발행일1964-03-29 [제416호, 4면]
딕슨에게 편지를 띄운 뒤의 내 마음은 어쩐지 초조했다. 얼굴의 미(美)에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그의 부모가 찬성하리라는 기대가 컷지만 만약의 일이 염려되었다. 그리고 보니 딕슨의 존재가 내 마음을 상당히 점령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알까바 답은 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내가 만나자고 한 날은 학기말 휴가로 들어서는 첫날이었다. 그날은 조회만이 있으므로 조회가 끝나는대로 「뮤직홀」로 갈 예정이었다.
나는 가슴에 고동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조회 시간에 교장의 주의도, 그리고 교실에 들어가서 담임이 뭐라고 하는 소리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를 않았다
딕슨의 여성적이면서도 어딘지 단단하게 생긴 얼굴만 머리 속에서 오락가락했다.
담임이 막 얘기를 마쳤을 때 힐긋, 복도를 보니 아버지가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왜 왔을까?』
가슴이 덜컥했다.
아이들은 왁자하며 교실밖으로 나가는데 담임이 내 이름을 부르며
『아버지와 함께 응접실로 오너라!』한다. 눈치가 담임이 아버지를 부른 모양 같았다. 교실에는 담임에게서 지명된 청소당번만 남고, 물 쓸 듯이 학생들이 복도밖으로 빠진 뒤에 아버지는 교실 안에 들어와서 구석에 섰는 나를 힐긋 보더니 선생과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무언지 속닥거린다.
『너의 아버지 왜 오셨니?』
청소당번으로 뽑힌 강숙이가 내 옆에 와서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웃었다.
청소당번 속에는 춘자도 끼어 있었기 때문에 불안한 기분을 일부러 감추었다. 춘자는 모르는척 하면서 힐긋 힐긋 보고 있었다. 선생과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서니 선생은 잠깐 기대리라 하고 나가더니 영문 편지 한통을 손에 들고 이내 돌아왔다.
선생은 그 편지를 탁자 위에 놓고는 입을 열었다.
『딕슨이란 미군이 양나순에게 「러브레터」를 보냈읍니다. 원래는 편지함에 꽂혀 있던건데 일부 학생들이 이 편지를 뜯어본 모양입니다. 보니, 연애편지라, 제 책상 위에 놓고 달아났더군요. 아버지가 좀 보시죠?』
선생은 편지를 아버지 앞으로 내밀었다. 이때 힐긋보니 날짜가 한 오일전 것이었다.
내 편지를 받아보기 전에 보낸 것이었다. 아버지는 따끔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더니, 그 피봉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속에서 편지를 꺼내폈다. 「예스」와 「노」 밖에 모르면서도 아버지는 제법 오랫동안 영문편지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난 돋보기를 안가지고 나와서 못보겠으니, 선생이 좀 보아주시요!』
아버지는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담임은 영어선생이기 때문에 받아서 영문 그대로 술술 읽어내갔다.
『…아니… 참…』
아버지는 영문을 이해나 하는 듯이 이런 감탄사를 냇다.
『들으신 바와 같이 상당히 열렬하게 쓴 편지라, 학교로서도 묵인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를 오시라고 한 겁니다!』
『조금 모르는 귀절도 있으니 우리말로 색여 읽어 봐 주시요!』
아버지는 말한다.
담임은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순이여! 한동안 너를 못만난 사이에 나의 마음은 더욱 그대 위로 달리고, 나는 이제 너는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깊이 느꼈다. 너에게서 무슨 소식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도 없기에 초초하여 학교로 편지를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너와 나와 만나야겠다. 다음 일요일 열두시에 「뮤직홀」로 오너라, 꼭이다.』
선생의 시선이 편지 위에서 오락가락 하는 사이에 아버지의 험악한 눈초리는 몇번이고 나를 쏘아보았다. 그 눈은 내 머리채를 잡아끌던 때 이상으로 사나왔다.
『우리 나순이는 그녀석을 좋아하거나 그러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놈이 공연히 귀찮게 구는거죠!』
아버지는 눈을 껌벅거리며, 아첨하듯이 담임에게 말한다.
『저만 알았으면 쉬쉬하겠는데 누가 교장선생님 한테까지 이런 편지가 왔다고 투서를 해서 지금은 학교 전체의 문제가 되어 있읍니다!』
담임은 난처한 듯이 말한다.
『남의 편지를 뜯어 본 건 누구야요?』
나는 물었다.
『그건 아직 모른다. 너로서도 누가 네 편지를 뜯어 보았느냐 하는 것 보다는 이런 편지가 학교에까지 날아오도록 된 까닭이 문제인걸 알아야 한다!』
『전 딕슨이란 사람 몰라요, 저쪽에서 맘대로 편지하는걸 전 책임질 수 없어요.』
나는 시침을 딱 떼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도망길은 그거 하나 밖에 없었다.
『딕슨이란 미군과 「뮤직홀」에서 여러번 만났다고 하던데?』
『선생님 보셨어요』
나는 일부러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투서한 학생들이 보았다고들 한다.』
『그 투서한 아이들 저와 대겨시켜 주세요!』
나는 매우 어굴한 표정으로 강경히 말했다.
『…정말 양나순이는 딕슨이란 미군을 모르니?』
『「뮤직홀」에서 제가 아는 대학생의 소개로 알았을 뿐이야요. 쌍통도 일그러진 자식한테 제가 무슨 연애를 해요, 분해요』
하며 나는 탁자위에 엎드려서 울었다.
울면서 내가 연극배우의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감독은 엄하게 하고 있으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어쩌다 영어 마디나 배운다고 말이나 주고 받은걸 딴 아이들이 보고 오해했거나 잘못 소문을 퍼뜨린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는 나를 두둔한다기 보다는 자기의 아버지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 일만은 제가 교장선생님에게도 잘 얘기 하겠읍니다만은 앞으로는 오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아버지께서 각별히 감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거 딸 하나 있는 것을…』
하며 아버지는 십팔번인 넉두리를 장황히 꺼내기 시작했다. 가죽가방 준 얘기로부터 자기가 어머니 이상의 신경을 쓰며 애지중지 키운다는 이력을 마치 긴 소설책이나 읽듯이 벌려놓았다.
선생은 네에 네에 하면서도 볼일이 있는지 시계만 자꾸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중에는 선생의 입에서 선 하품이 나왔다. 그래도 아버지는 비단결 같은 얄삭한 목소리로 넉두리를 계속한다.
『…저어 오늘은 제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하며, 담임은 참다못해 일어섰다.
『제가 교장선생님에게 말씀을 드릴까요?』
아버지가 말하는 걸,
『아니올시다. 제가 말씀을 드리죠!』
담임은 이렇게 말하며 선처할 것을 약속하고 아버지와 나를 현관까지 전송을 했다.
『이년…』
선생의 얼굴이 뒤로 돌아서자 아버지는 쇠꼬치 같이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두 참, 깡통 땜에 딕슨 만난거아냐요. 그후로 만난줄 아세요…』
『정말이냐?』
『거짓말이면 벼락맞아도 좋아요』
나는 어굴한 표정을 다해서 대답했다.
『…이제는 너 절대 밖에 나가면 안된다』
아버지는 이 정도로 말하고 아까 모양 쏘아보지는 않았다.
한길로 나오자 아버지는 딴데 볼일이 있는 모양으로 나를 끌고 집으로 가지는 않았다.
『곧 집에 돌아갈테니 너 집에 꼭 있거라』
하며, 내가 버스를 타는 것을 보자 아랫길로 사라졌다. 나는 두정류장째에서 내려서, 명동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시간은 약속한 열두시가 달랑달랑했다.
「뮤직홀」의 층계를 오르면서 나에게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두렵지도 않고 하나의 희극 같이 우습기만 했다.
딕슨은 방금온 모양 「홀」에 들어갈 표를 사고 있었다.
『딕슨-』
나는 소리쳤다.
『오호-』
하며 딕슨은 반가와한다.
『고향에서 편지왔어?』
나는 다른건 제쳐놓고 그것부터 물었다.
『음, 어제-』
『뭐라구 했어?』
『너 스스로 읽어보아라-』
하며 안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낸다.
딕슨의 웃는 얼굴을 보니 필경 좋은 소식일 것 같았다. 그래도 어딘지 좀 불안하면서, 「홀」에 들어갔다. 음악은 귀게 들어오지도 않고 앉자마자 편지부터 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