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깐=RNS】 그리스도교도 일치의 교황으로서 청사에 빛나는 선교황 요안 23세는 15세의 소년시절에 이미 자기의 장래를 구상한 바 있었다.
그가 신학생으로서 14세부터 시작하여 교황으로 임종하기 1년전인 81세까지 계속한 그의 일기가 『한 영혼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당지에서 출판되었다.
농부의 아들 14세 소년 안젤로 쥬셉베 롱깔리는 신학교에 입학 직후 1896년 촛불 밑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동방의 회두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리된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성체와 성모와 모든 성인들에게 빌겠노라』
그 젊은 신학생은 사제품을 받기도 전에 교황위에 올을 가능성을 꿈꾸었고 「어머니 겸 교사」(자모 겸 은사) 「지상의 평화」 양대 사회회칙에 나타날 노동자들에 미칠 맑스주의의 위협에 미리 관심을 가졌었다. 크고 작은 종이 조각들과 잡기장에 적힌 동 교황의 사상은 그의 개인비서 이든 르리스 까뽀빌라 몬시뇰에 의해 편찬되었다. 동 몬시뇰은 서문에서 교황의 말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착하고 구김새 없는 아이었으나 좀 겁쟁이었다. 나는 전력을 다해 천주를 사랑하고 싶었고 사제가 되기밖에는 아무런 딴 생각이 없었던 반면에 자신의 사랑이라는 내 자신 안의 원수와 투쟁하면서… 만사를 진지하게 다루었고 양심 성찰은 세밀하고도 엄격했었다.』
요안 교황은 사제품을 받기 2년전인 21세때에 장차 교황이 될 가능성에 언급했었다.
『아마 당신의 탁월하신 계획을 위해 나를 이곳 「로마」로 대려오시고자… 천주께서 그처럼 많은 난관에서 나를 들어 올리심으로써 당신의 가장 미묘하시고 아버지 다우신 유렴을 나에게 쏟으시는 것 같다.』
그러나 『참을성 있고 인자한 보살핌이 필요한 평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사제가 되고 싶었다고 일찌기 적었던 서민출신의 청년도 이러한 소박한 귀절을 달았다.
『만일 내가 교황이 되어 나의 이름이 모든 입에 올라 존경을 받고 모든 대리석에 새겨질지라도 내가 저 거룩하신 시판관 앞에 나아갈 때 그때 나는 무엇이 될 것인고? 그만치 거창한 일이다!』
1901년에 그는 군에 소집되어 신학생훈련이 1년간 중단되었었다.
공산세계와 자유세계 아이의 긴장완화를 위해 만인을 포섭하는 사회회칙을 장차 쓰게될 그는 사제품을 받기 1년 전에 「메이 데이」 「데모」에 관해 이렇게 썼었다.
『종교가 없고 천주가 없고 가난하고 역설전에 이용된 무의식한 군중이 오늘 비록 더러는 가장 옳다손, 대체로 비틀리고 이단이 된 공상적 이상을 부르짖었다.』
그는 사레지오의 프란치스꼬 성인(1567-1622)을 본받아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를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언제나 진지성과 순박성을 가미하여 재미있고 명랑하고 행복하기로』 헌신했었다.
그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소집으로 전세계를 놀라게 했으나 그 당시의 일기에 『나는 내 열성을 제어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