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온 봉재성절에 신부님 위에 천상강복 풍부하시기를 빕니다. 다름 아니라 신부님의 2월 19일부 서신 지금 마악 받고 즉시 회답합니다. 말씀하신 왜관수도원의 간행인 「미사경본」에 관한 논평을 위촉하심 받고 한마디 적습니다.
그 책을 직접 입수하기 못했으므로 읽을 수 없읍니다. 또 설사 책이 입수된다 하더라도 일전 귀 교구 부감목 이명우 신부님의 3월중순 교우피정에 내구(來邱)를 종용하신데 대하여 설명한 그같은 이유로 지금은 응할 수 없고 또 가까운 장래에도 그것이 용이하지 못할 것 같읍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평하기 전에 그 방대한 대책자(연중 미사경본이라면 부피도 상당할 것이므로)를 전부 독파해야 할 것임에 비추어 매일 수도원 교편생활에 얽매인 몸으로서 단시일내에 그것을 정독하기란 거의 불가능이기 때문에 그뿐 아니라 과거 몇해전 소위 「새공과」문제를 귀 시보에 연재공개를 위한 수개월간 헛수고와 아까운 정력 소비만의 경험도 있고 하므로 남의 저서에 대한 개인적 평론을 시도할 마음이 적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미사경본」에 대해서 두가지만 여기 말씀드리겠읍니다.
마침 지나간 봉재후 첫주일 성경을 미사중에 수녀들에게 낭독(여태까지는 미사후에 강론하다가 처음으로 미사중에서) 하느라고 그 책을 잠깐 빌려 읽은 바(단지 그날 성경 한가지만 읽어보았을 뿐이므로 다른 것은 전연 알지 못함) 거기 SCRIPTUM EST : 『NON TENTABIS DOMINUM TUUM』
또 그 아래 역시 SCRIPTUM EST : 『DOMINUM DEUM TUUM ADORABIS』를 두군데다 『주께서 천주를 시험하지 말라』라고 번역 또는 『주께서 네 천주를 흠숭하라』라고 번역하여 두군데나 「도미놈」을 「도미누스」로, 즉 목적격을 주격으로 뒤바꾸어 놓아 그 뜻을 상하문맥에 따라 알아닫는다면 『「기록에 주님이 천주를 시험하지 말라」 또는 「주님이 네 천주를 흠숭하라」라고 실려있다.』로 되었으니 이건 결국 「천주가 천주를 시험하지 말라」 또는 「천주가 네 천주를 흠숭하라」라고 쓰였다 라는 말이 되고 마니 이것은 곧 「사람은 천주를 시험해도」 상관없고 또는 「사람은 네 천주를 흠숭」 안해도 상관없다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사실은 『네 천주이신 「그 주를」 네가 흠숭하라』 또는 『네 천주이신 「그 주를」 네가 시험하지 말라』는 뜻이 분명하지 않을가요? 그렇다면 그 책에 번역은 본문과 엉뚱한 모순이 되게 해놓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지 않을가? 여기 대한 「라띤」말 본문이 결코 복잡하지도 어려운 문구도 아닌대도 불구하고 그식으로 번역하는 것만 보아도 그 책의 번역 내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음에 따라 다른 대를 다시 더 읽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일전에 주교댁에 올라가 타국신부님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그 책엔 「너 네」라는 말은 전부 없애 버리고 말았더라 함을 들었는데 그 대신 무슨 말로 대치햇는지는 모르겠으나 필경 「주」 혹은 「당신」으로 바꾸어 놓은 듯한데 천주나 성모 또는 성인에게 대해서 우리가 어린 적자의 마음으로 기구하는 그 태도를 꼭 인간사회에 있어서 장성한 어른이 예의를 갖추어 서로 담화하는 그 태도라야 쓴다는 견해와 사고방식을 따르려 함인듯 하나 여기 대해서 과거에 길게 설명하여 「가톨릭시보」에 공개해 달라고 보냈던 졸고를 참수질식되고 말았으니(그 졸안이 아직 내 테불 위에 있기는 하나) 다시 또 그것을 궅태여 개설하려는 것은 아니나 소위 「당신」 지금말로 「자기자신」이란 결코 「제2인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천주당신 영광을 드러내고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라 함 같이 여기는 『자기자신의 영광』이란 제3인칭이 되고 혹은 죽은 부모에 대해 누구하고 말할 때 『당신이 살아계실 때 이러저러…』라 함 같이 여기는 「그 어른이」란 역시 제3인칭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덮어놓고 「당신」이라 하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호하고 「너 · 네」 또는 「그대」라는 말은 틀림없이 말하는 중에 「상대방」을 지칭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결코 저 「공포」의 교였던 구약시대의 교가 아닌 「사랑의 교」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구약시대엔 아닌게 아니라 천주를 「지극한 엄위」를 갖춘 「용상」에 높이 앉은 「만승천자」로만 여겨, 그를 한번 바로보기만 하면 곧 마치 저 「결약의 궤」를 바라보던 「벨사미때」처럼 당장 죽을 줄만 알아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고 「야베」라는 천주 이름도 마치 한 「따부」(禁忌)로 알아 바로 부르지 못하고 그대신 「아도아이」니 「무미니」로 부르다가 필경은 오랫동안 「야베」란 명칭을 아주 잃어버리기까지 되었다가 겨우 중세기 이후에 내려와서야 도로 찾았던 것이고, 또 우리 「사랑의 교」 시대에 와서도 저 유태인의 사고방식을 옮겨받은 17세기 열교 「얀세니스따」들의 사상 때문에 중세기에 그처럼 「거양성체」를 바라보려는 야심에서 하루에도 수십대 미사의 「거양성체」만을 치어다보려 몰려다니고 심지어 대미사때 「거양성체」중 차부제가 뒤에서 분향(焚香)하기 때문에 「성체」가 잘 안보인다고 신자편에서 일어나는 야단법석 때문에 서간편 옆댕이로 쫓겨난 것이 오늘까지 「예전」에 그대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열교인들은 엄위하신 천주의 성체를 치어다보면 못쓴다 하여 모두들 그때이면 이마를 땅에다 조아리며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엎드림으로써 「거양성체」의 본뜻인 「성체」를 바라보며 흠숭하라는 듯을 전연 망각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을 최근에 와서 교황청으로 하여금 7년7사십일 은사를 붙여줌으로써 겨우 다시 성체를 바라보게 복구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천주를 사랑으로써 대하게 됨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주를 「아버지」로 대체하심으로부터 시작이니 그 많은 구약성서 40여권 중에는 불과 10여번 밖에 찾아볼 수 없는 「아버지」의 호칭도 예수님은 언제든지 천주로 직접 지칭하실 때는 꼭꼭 「아버지」라 하사 구약서 보다 몇배 적은 신약성서엔 자그만치 240여번이나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어리고 천진난만한 자녀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어루만지며 그젖을 빨고 있을 때 「어머님 당신」 「아버지 당신」이라 부를 것인가, 천주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고 사는 천주교 신자로서 모든 사랑의 「풀뭇간」인 성삼의 현의로 미덩야 할 우리들이 천주께 대해 더우기 『너희가 둘 이상 내 이름을 위하여 모인 거기 나 특별히 내림하여 현전(現前)하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믿고 여럿이 한테 모여 「경신례」인 「예전행사」를 행하는 그 가운데 와 계시는 천주, 바로 우리게 살과 피를 먹이시는 그 천주께 『사랑에 가득찬 천진만만한 태도』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신자여 네 이름… …네 나라… 네 거룩하신 뜻』이라 못할 것이 무엇인가?
또 그리고 현하 사회적 예의를 우리 한국사람만 못지않게 찾고 있는 문명한 나라들(예로 일본의 「난지」(汝) 영어의 THY NAME, THY KINGDOM THY WILL 등등)이 다들 「너」라 하는 이것을 어찌하여 우리만이 그뜻의 호함과 양의적(兩意的) 성분을 다분히 가진 그러한 용어로 꼭 바꾸어 놓아야 할 필요가 나변에 재한가. 단지 불어의 VOUS VOTRE란 결코 우리말의 「당신」과는 달라 비록 복수이기는 하나 분명 제2인칭으로서 바로 상대방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들의 대치는 별 문제일 것이다.
1964년 2월 24일 주 바오로
朱在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