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敎會議(주교회의)에 期待(기대) - 典禮(전례)의 敎育(교육)문제
『미사대에 아무 다른 기구를 하지말고 오직 미사 경문대로만 기구하라…』 비오 11世(세)
司祭(사제)는 신자들의 경문 읽기에 맞춰 가야
한국인의 祭禮(제례)에 대한 깊은 觀念(관념)
발행일1964-04-12 [제418호, 2면]
【承前】 전례는 교회에서 거행하는 모든 예식들을 포함한 만큼 그 범위가 가장 넓읍니다. 말하자면 칠성사나 준성사와 사도예절과 장례식 등등 전부가 다 전례적 행위이고 따라서 전례를 개혁하고 장려하여야 된다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요구에 관한 것이지만은 교회의 모든 예식 중에 교회 자체의 생활이며 각 신자의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대하고 제일 효과적이며 제일 공식적 행위는 미사이기 때문에 공의회의 전례개혁과 장려에 관한 요구는 무엇보다도 미사성제 전례에 대한 규정임을 생각 아니할수 없읍니다.
우리 한국 시자들이 미사에 열심으로 참례함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의 장려와 개혁에 관한 원칙』에서 요구한 바와 같이 신자 전체가 의식적으로 또한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례함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지 의문입니다.
현대의 전례적 운동은 벌써 오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토대는 성 비오 10세 교황의 표어인 『만사를 그리스도 안에 갱신하자』는 안에서 찾아볼 수 있읍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이신 비오 11세께서 모든 신자들을 경고하시기를 『NON IN MISSA ORARE SED MISSAM ARARE』 즉 『미사 때에 아무 다른 기구를 하지말고 오직 미사경문대로만 기구하라』고 하셨읍니다. 교황의 이 경고를 한국에서도 실천하기 위하여 벌써 30여년 전에 덕원 대수도원에서 미사경본책을 번역 발행함과 동시에 일반시자들도 하여금 미사의 의미와 형성의 해설 및 미사규식책이 발행되었고 그때부터 벌써 덕원 · 함흥 · 연길교구에서 합송미사를 드리게 되었읍니다. 그 당시 이 합송미사의 운동은 이 3교구의 경계선을 넘어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교구에서는 이 운동이 본당 단체나 신자들의 개인신심생활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 대단히 유감스러웠읍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야 이남에서도 여러본당에서 미사를 합송으로 드리게 된 원인 중에 하나는 벌써부터 이처럼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기에 익숙한 이북신자들이 피난하여 이남의 여러 본당으로 흩어져 가게된 데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로 인하여 한가지 참다운 평신자사도직을 행하였다고 찬양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많은 본당에서 신자들은 사제가 제대앞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미사를 드리는 듯하는 결과로 신자들이 뒤에서 각각 따로 묵주신공이나 조과나 다른 개인 기구를 드리거나 혹은 성가대에서 몇몇 사람들이 미사 경과와 아무 관련이 없는 4부합창을 한다는 사실이 오늘까지 있읍니다. 이런 사제들과 신자들이 시대와 전례 요구 뒤에 너무나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이처럼 미사를 드리는 사제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분배자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이처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이 미사의 풍부한 은혜를 완전히 받지 못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런 태도는 마치 어떤 사람이 왕의 궁전에 초대를 받고 왕이 차려주신 잔치를 받아먹는 것보다 그 궁전의 한 구석에 앉아 자기가 가져온 시시한 밥을 먹는 것과 같읍니다.
이처럼 미사를 드리거나 참례하는 폐단을 없애고 미사의 은혜를 완전히 받게하기 위하여 신자 전체가 능동적으로 또한 의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하라는 명령이 이번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서 내리게 되었으며 이 능동적과 의식적 참례함의 장려는 사목직을 맡은 모든 사제들에게 명하게 되었읍니다.
다시 말한다면 공의회에서 전례와 특히 미사에 대하여 세가지 요구를 내렸는데, ①신자 전체의 참례, ②능동적 ③의식적 참례란 것입니다. 그런데 전례규법 제14항에 있는 바와 같이 우선 사목지을 맡은 사제들은 전례의 정신과 그의 심력에 깊이 몰두하고 있지 않고 또한 열심과 인내를 가지고 신자들의 전례적 교육에 대하여 항구히 노력(제19항)하지 않으면 이 세가지 요구를 실천할 희망이 전혀 없읍니다. 이 세가지 요구 중에서 능동적으로 참례시키면 한국사람들의 성품은 본능적으로 활발하니까 제일 쉬울듯 합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미사중에 개인적 기구를 드림이 습관이 된 노인들을 갑자기 달리 교육시킴은 어렵지만 어느 본당이든 학생이나 남녀 청소년들의 「구룹」이 있거나 혹은 조직할 수 있으니 그들과 미사경문의 「계」 「응」 을 하고 외적으로 능동적인 참례의 인상을 준다고 하여 사목적을 맡은 사제가 이것을 만족하게 생각하여서는 안됩니다. 공의회가 제시한 세가지의 제일 중대한 요구는 의식적으로 참례하라는 까닭입니다. 이 세가지 요구를 실천하지 못할 것 같으면 미사에의 참례는 아무리 능동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가지 외적 형식과 입술의 기구에 지나지 못하니 우리에 대하여도 천주께서 구약시대 백성에게처럼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으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다.』(이사야 29,13) 하실 수 밖에 없읍니다. 신자 전체를 의식적으로 미사에 참례 시키기 위하여 미사예식과 미사의 형성과 경과에 대한 인식을 빈번한 강론과 교리강좌 또한 그림과 환등사진으로 심각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외교인들이 첫번으로 우리 성당에 들어와 미사 전례를 볼 때에는 천주교회에서 모든 예식이 엄숙하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말을 우리가 가끔 듣게 됩니다. 또 과연 그럴듯도 합니다. 우리가 그를 따라 거행하는 미사와 또한 다른 모든 종교적 전례는 천년이상 전에 구라파 사람들의(또 부분적으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관념에서부터 여러 세기를 통하여 현재의 형식을 취하게 된고로 색다르다는 종교적 관념을 가진 동양사람으로서 세밀한 설명이 없이는 이해하고 따라가기 힘든 것입니다. (전례중에 많은 부분과 예식들은 변할 수 있는) 즉 고정법규가 아닌만큼 「바티깐」공의회에서 결의된 전례의 장려와 개혁규범 제1항에 있는 바와같이 현대의 필요성과 민족의 이해성에 따라 변하게 할 수 있으되 그 변함이 각 나라의 주교회의와 「로마」 예부성성의 허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미사 전례는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주성부께 드리는 신약의 유일한 제사입니다. 즉 「드리덴띠노」공의회 제22회합 C.1의 정의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영원히 유효한 구원을 얻어주기(헤브레아서 6,12) 위하여 십자가 제대상에서 자신을 한번만 성부께 제물로 드리셨으나 그의 사제직을 죽으심으로 끝을 내려고 하지 않으시고 더우기 최후의 만찬에 그의 몸과 피를 면주(麵酒) 형상안에 성부께 드림으로 그의 교회에게 한 제사로 남겨두려고 하시었읍니다.
이 제사로 피를 흘리게 될 십자가상 유일한 제사를 현실화하며 그에 대한 기념을 세상 마칠때까지 보전하는 동시에 우리가 날마다 범하는 죄를 사하기 위하여 힘이 있는 치료법을 얻게하려고 하시었읍니다. 이 정의로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미사가 한가지 개인적 본질을 가진 심심행위가 아니라 오직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 유언을 의지하여 또한 그를 통하여 드리는 공식적 제사임을 확실히 나타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미사때에 행하여지는 모든 예식을 얼른 완전히 이애하지 못할지라도 한국사람들이 제사에 대한 관념이 깊은 만큼 미사성제의 뜻과 중요한 부분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줄 생각됩니다.
즉 어떤 제사의 목적은 신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한가지 물질적 제물을 바침으로 신의 힘과 은혜를 얻거나 신과 결합함에 있는 것인고로 어떤 제사가 제물준비 제사거행 제찬봉영이란 이 세가지 부분으로 형성됩니다. 우리 제헌미사(제헌전례)에 있어서 이 세가지 부분이 뚜렷하게 거행됨을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미사전례에 의식적 참례에 관한 교육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또 제헌미사에 능동적과 의식적으로 참례하려면 재물 준비에 있어서 각 신자가 한가지 물질적 희생과 제물(헌금)을 바쳐야 되며 제찬봉영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이 (영혼과 육신의 예비를 가정함) 주의 식장에서 준비된 영혼의 양식을 받아 먹어야만 된다는 인식을 더욱 더욱 밝힐 것입니다. 제헌미사의 세가지 부분으로 천주성부께 그이(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이와 함께 그이 안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제사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제찬봉영으로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실제적으로 천주와 결합된다는 것을 이해한 신자들은 쉽게도 제헌미사 전에 드리게 되는 예비미사(말씀의 전례)의 의미와 목적을 인식할 수 있읍니다. 즉 우리가 실제로 천주와 결합함이 바로 예비미사(말씀전례)로 이루어 집니다 즉 말씀의 전례의 첫 부분인 「기구」로 우리가 천주 대전에 나아가서 우리의 말씀 드리고 둘째 부분인 「교리」로 (서간 복음 강론) 천주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사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나리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파견」 때에 그리스도께서 마치 종도들에게 『성부 나를 보내심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하심과 같습니다.
즉 우리 가족과 사회를 그리스도화 하여야 된다는 이 우리 사명을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새로이 인식하여야만 미사에 효과있게 참례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미사성제의 은혜가 우리 안에 또한 우리들을 통하여 사회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읍니다.
미사때에 사제가 행하는 예식과 교우들이 가져야 할 정신을 더욱 잘 알아듣기 위하여 본래 독일 「보이론」 「성베네딕드」 대수도원에서 만들어진 「미사성제도해」가 참고가 되지 않을가 해서 번역하여 독작들에게 드리고저합니다. 사목직을 맡은 사제들은 이 미사성제도해를 크게 그려 성당에 걸고 또 신자들에게 이대로 미사 전례를 설명하면 퍽 유익하리라고 생각됩니다.
합송 미사를 드리기 위한 몇가지 제안.
전례 장려와 개혁운동에 있어서 미사중 특히 예비미사(말씀의 전례)때에 각 나라의 자국어를 사용함이 즉 사제가 직접 신자들을 향하여 자국어로 기구를 드리고 서간경과 복음을 낭독함도 제출되어 있으나 그 구체적 실행 규정은 각 나라의 주교회의 결정에 달려있읍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이 결정이 어떻게 되던지 간에 전례의 정신과 전례에 대한 관심을 가진 모든 본당신부들은 평일 미사를 합송미사로 드리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신자들이 미사중에 다른 기구를 드리지 않고 미사통상문을 공과에 있는대로 남녀가 계응하고 비통상문을(초입경 축문 서간 봉헌경 등) 미사 경본대로 음성이 명확한 지도자를 통하여 낭독하게 할 수 있으며 사제 자신도 미사를 되도록 빨리 드리는 것보다 경문을 자국어로 외우는 신자들과 맞추어 드리는 것이 공의회의 요구에 적합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소첨례날에는 합송미사를 드리는 것을 원하는 바이며 또한 될 수 있는대로 미사와 그 첨례나 시기에 적합한 성가를 일정한 때에는(사제가 입당할 때부터 고죄경 전까지 제헌경과 헌병문 후부터 묵념축문 전까지 신자영성체 동안 마지막 복음부터 사제가 제의실에 들어갈 때까지 또한 경우를 따라 영광경 대신 성가 6번이나 14번 거룩하시다. 대신 성가 9번이나 17번을 부르면 더욱 능동적 참례가 될 것입니다.
주일날에는 이보다도 좀더 성대하게 합송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초입경 층계경 제헌경 영성체경을 성가대원 단체가 음정을 붙인 낭독을 얕은 음정으로 시작하여 음정을 부분적으로 삼단계로 1음정씩 높였다가 다시 첫 얕은 음정으로 끝마치고 또한 서간경과 복음을 음정이 명확한 청년 두 사람이 제대간에 들어가서 신자들을 향하여 낭독함이 신자들의 마음에 퍽 깊은 자극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교회의에 드리는 몇가지 제안 ①신자 전체가 능동적 · 의식적으로 미사에 참예할 수 있기 위하여 미사에 관한 기구책(공과, 미사경본, 미사통상문, 나의 주일미사, 성가책)을 누구나 살 수 있는 싼 가격으로 발행하여 한국교구 주교님들이 이에 대한 원조회를 조직함이 필요할 것 같읍니다. ②현대에 사용되는 종교적 서적의 대부분은 그 언어의 관용에 있어서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지므로 현세대 사람들은 특히 예비자들은 알아듣기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십이단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책들은 철저히 검열하여 그중 특히 지나간 세기의 중국교회에서부터 넘겨받은 가톨릭술어들을 알아듣기 쉽게 현대언어 관용과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 같읍니다. ③문답에 있어서 특히 성사편을 현대 전례적 요구에 동화시키며 개편함이 필요할 것 같읍니다. ④칠성사 중에서 성세, 견진, 혼배, 종부의 예식과 봉성체와 사도예절과 장례식을 우리말로 거행할 허가를 주시면 신자들이 그 예식으로 말미암아 더 깊은 감명과 큰 신익(神益)을 받을 것이며 또 이로 인하여 그들의 전례적 관심과 이해가 더욱 많이 장려될 것 같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