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9) 고발 당한 신부
생활 속에 배인 미국인 신앙
얼음에 넘어지고 신부 고발
발행일1964-04-12 [제418호, 3면]
남의 신심생활의 신앙도(信仰度)를 밖에 드러난 표정만으로 감식하려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어금니를 꽉물고 눈동자를 치뜨고 그리고 손바닥을 맞비벼대며 -「열심」을 그렇게 쥐어짜냈다고 해서 반드시 천상과의 영적(靈的) 교통이 원활하다 할 수 없듯이 기계적으로 미사참례하는 듯이 보이는 그들의 외관적 표정이 있다고 해서 도맷금으로 미국 교우의 신앙도를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신앙심을 과장하는 표정이 없는 대신 사회생활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신앙의 기본자세가 있다.
매일 아침 미사 참례 다니는 열심한 교우 할머니가 성당바로 앞길에서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물론 한국식으로 한다면 담이 결릴정도의 부상을 당했지만 곧 본당신부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나는 이런 얘기를 신부님으로부터 듣고 놀랄수 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매일 미사참례 다니는 교우가 신부님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요?』
태연하기만한 신부님은 내 반문이 오히려 놀랍다는 표정이다.
『신심생활과는 별도죠. 교우가 본당신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 훌륭한 처사야 못되지만… 교우라고 자기권리 보호를 포기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암만 생각해도 나는 성당앞 길거리에서 얼음판에 미끄러져 넘어진 것이 어떻게 본당신부를 피고로 만들 수 있는 거리가 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제물에 넘어지고선 왜 신부님께 대드는건가요?』
『그건 대든다고 생각할게 아니죠. 미국의 관습으로는 자기 집앞의 도로는 뭇사람들이 어떤 피해라도 입지 않도록 보안(保安)할 의무가 있거던뇨…. 눈이 내린다음 말씀히 제거해야 되는데 밤사이에 눈이 또 온 것이 치기도 전에 얼어버렸단 말에요, 새벽미사에 온 그 노인이 그 위에서 미끄려저 넘어졌거던뇨, 그러니 자기가 넘어져 다치게 된 것은 본당신부의 책임이라는 거죠.』
나는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야 이런 소송을 제기했다고 해서 본당신부님이 일일이 수사 기관이나 법정에 나가지도 않고 또 무슨 욕을 보시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 할머니에게 5백「달라」의 치료비용을 내주라는 판결에 따라 그 판결문서를 보험회사에 보내어 그 회사에서 지불토록 한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 본당에선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을 생각하고 미리 보험에 들어두나요?』
『물론이죠.』
그러고 보니 「볼티모아」에서 개업하고 있는 외과의사 장종완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의사의 실수로 수술을 잘못해 사람을 죽였읍니다… 하고 환자 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해가지고 법정에서 승소하게 되면 판결대로 2만「달라」나 3만「달라」를 피해자 가족에게 내주게 되는데 그런 경우를 미리 생각하고 보험에 들어두었지. 만일 보험에 안들었다간 패가망신하기 쉽거던.
나는 아직 그런 일은 안 당했지만… 어쨌든 편리한 보험제도지….』
물론 본당신부를 상대로 소송 제기하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보험회사에서 지급되는 배상액이라고는 하지만….
이같은 교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40년동안 매일 아침마다 있는 창미사를 혼자 풍금을 치고 노래도 부른 할머니도 있었고 (피츠버그, 성베드루 성당) 30년동안 성당 풍금을 쳐온 분도(마운트 버나, 성마리아성당) 있었다. 모든 것을 「달라」로 환산하는 미국에서도 이같은 봉사적인 교우도 수없이 있는 것이다.
본당신부를 괴롭힌 할머니를 본당에서 경원하지 않듯이 40년동안 성가의 반주를 맡은 할머니라 해서 반드시 열심한 교우 대접을 유달리 받지 않는 것도 미국적이라고나 할까?
한국에서처럼 이런 갸륵한 분들에게 표창하는 일도 없다. 하기야 본당신부 본명첨례라고 해서 찾아와 축하해주는 행사도 없는 나라니까-
이같은 점으로 볼 때 본당신부와 교우관계에 있어 한국은 확실히 앞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이같은 미풍을 폐풍으로 보는 이도 있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