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부산) 張炳華(장병화) 몬시뇰
동생들엔 어진 「누님」 노릇
後輩라도 支配하지 않아
발행일1963-09-22 [제392호, 4면]
그의 결점을 하나 지적한다면 키(身長)가 약간 작다는 것밖에 아무 험잡을 것이 없다.
사람됨에 있어 그는 성실하며 겸손하고 인정 많은 이다. 출생 후 3일만에 영세를 한 『태전(胎前) 교우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신학교 입학 당시에는 주교님의 허락이 쉽게 내려지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되겠읍니다』고 한 간절한 원의는 마침내 주교님과 교장신부님을 움직이게 한 바 되어 그는 16세 되던 해에 다른 학우들보다는 3년 늦게 대구에 있었던 「성 유스디노」신학교 「라띤」어과에 편·입학이 되었던 것으로써 이러한 특전을 받기까지 그는 매일같이 본당 신부님께 간청하였고 8개월동안 「라띤」어의 특별 개인 교수를 받아 시험을 쳤던 것이다.
대구에서 출생하여 생장한 그는 12세 되던 해에 어머니와 세 동생과 같이 성세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아직 외인이었고 10세 되는 큰 동생도 영세 전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2대에 걸쳐 가문(家門)의 외동아들이었으므로 아버지는 맏아들의 신부 지망을 달갑게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 데레사 여사에게 어릴 때의 그의 이야기를 물으면 『그 애는 무엇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내가 빨래나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면 밥은 언제나 제가 다 해 놓고 어린 동생들을 돌봐주며 기다렸고 신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도 방학 때 집에 오면 그 때 돈벌이라고 양말 코마개 하는 일을 저녁마다 꼭 1타식 거들어주고 제 할 공부를 했다.』
그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웠고 동생들에게는 형님으로서 보다 마치 어진 누님과 같았다. 누구에게나 큰소리나 짜증을 내는 일 없이 성낼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학교의 공부는 언제나 1·2등을 차지했고 얌전하면서도 명랑하여 장난을 좋아했고 운동 경기도 남 못지 않았으며 「올갠」도 잘 쳤다.
이러한 그의 좋은 품성과 여러 면의 재질은 사제로서의 생활을 더욱 빛나게 해주어 『다정하고 인자한 신부님!』으로 『존경과 신뢰를 받는 어진 신부님!』으로서 누구나 그 앞에 모든 근심 걱정을 털어놓고 하소연하며 그를 따르는 이의 수가 그의 사목(司牧) 생활의 연륜(年輪)과 함께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40의 고개를 넘어 벨기이 「루벤」대학에 유학하였지만 『열심한 한국인 신부님』으로 알려졌고 어른 잘 섬기고 보필하며 수하 사람들을 결코 지배(支配)하려 하지 않는 아름다운 덕성은 「선천적(先天的) 사제」라 할만하다.
사제서품 25주년을 계기로 「로마」 성청에서 그에게 「몬시뇰」의 영예를 준 것은 부주교라는 직책 때문만이 아니라. 그 개인에게 대한 표상이라 한다.
금년부터는 보좌신부 한 분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약 7천명이 되는 주교좌 본당을 혼자 맡아보기에는 너무나 힘겨웠던 것이다.
『주여 저 영혼들을…』
36년 전신학교에 들어가게 된 그 때의 그 기쁨과 포부로서 그는 바쁜 성무를 기쁘게 피로할줄 몰랐으며 영혼들을 위한 봉사에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바치는 모습은 영원한 사제의 「이메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