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19) 우정 ④
발행일1963-09-22 [제392호, 4면]
『어떤 음악을 제일 좋아하느냐!』
미군은 얄삭한 입술과 파랑 구슬 눈에 미소를 담고 묻는다.
『나는 음악은 아무거나 좋아하지!』
음악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나에게 그는 자꾸 음악 얘기만 끄집어낸다.
『베토벤의 작품에서는 어떤걸 좋아하느냐?』
『젊은 「지아이」로서는 유식한듯 했다.』
『……』
나는 대답 대신 빙긋이 웃었다. 베토벤은 독일이 낳은 유명한 세계적인 작곡가라는건 알지만 「월광곡」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제 9 「심포니」에 대해서도 그날 겨우 알았을 뿐이다.
『그럼 모챨트는 어떠냐, 하이든은 어떠냐…』
그밖에 내가 듣지 못하던 음악가의 이름이 줄줄 나온다.
『난 음악 몰라!』
귀찮아서 웃지도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외면을 하고 있다가 힐긋 그를 보니 파랑눈이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
『음악 얘기는 당신 친구하고나 해요!』
나는 코 끝으로 미스터 여드름을 가리켰다.
미군은 미스터 여드름을 힐긋 보고 웃더니 다시 내 얼굴쪽으로 허리를 굽힌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자. 영화를 좋아하느냐?』
『좋아하지만 「미들스클」에 다니는 우리는 어른들 모양 자유롭게 볼 수 없다』
『너는 한국의 소녀같지 않다. 나는 마치 우리나라의 「껄」을 대하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의 소녀이다.』
『너의 부모 중의 누가 외국 사람이 아니냐?』
『그렇지 않다』
『너의 눈은 「블루」색을 띠우고 있다?』
『그럼 너는 왜 머리가 노랗지 않고 동양사람 모양 까맣느냐?』
미군은 좌우를 돌아보며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내 말이 매우 웃으웠던 모양이다. 그는 까마작한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흥미로운 소녀다. 너를 오늘 알게된 것은 나의 행복이다』
그는 눈매에 쏟아질듯한 웃음을 담고 바라본다.
『우리 한국의 상식은 여성의 얼굴을 그렇게 자꾸 보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그럼 여자하고 얘기할 때는 어디를 보아야 하느냐?』
『아무데도 보지마라!』
『천장이나 땅을 보고 말을 해야 하느냐?』
『땅을 보고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미군은 미스터 여드름을 돌아보고 그러느냐고 묻는다.
미스터 여드름은 내 말에 장단을 못 맞추고,
『반드시 그렇지 않다!』
하고 대답을 한다.
『너는 여자하고 얘기할 때 땅을 보느냐?』
미군은 미스터 여드름에게 따진다.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너는 그런 말을 하느냐?』
미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우리 집은 구식 예절을 지키는 집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였다.』
『너는 조금도 구식으로 안 생겼다.』
『마음은 구식이다』
『이해할 수 없다』
미군은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농담을 하는거다』
미스터 여드름이 옆에서 지꺼렸다.
『아, 그러냐. 핫핫…』
미군은 크게 웃다가 조용한 주위에 놀란듯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어 우리는 얘기를 그치고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음악의 선률을 따라 나는 나 대로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미군의 눈에도 내가 저의 나라 사람에 가깝게 보이나 보지? 나의 출생은 과연 어떠한 것이였을까? 아버지 말대로하면 죽은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미국 여자와 연애 했다는 말도 우습다. 아니 사실 그렇다면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고 그가 위선자라도 좋아, 떳떳한 이 나라의 소녀인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기대보려고 하면 그 순간 무언지 발밑이 허물어지는 기분이다.
이때 미스터 여드름이 나에게로 허리를 굽히고 속삭인다.
『미군애가 점심 사겠다고 하는데 나갑시다!』
『내가 뭐 거진가? 점심 얻어먹으러 따라가게!』
『아니, 그런 의미로 해석할 건 아니야. 남의 호의를 솔직히 받으면 어때?』
내 기색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미군이 입을 연다.
『나는 너를 위해 점심을 대버하고 싶으니 네가 좋아하는 음식점으로 어디든지 가자!』
『고맙다. 그러나 내 가방 속에는 점심이 들어 있다.』
콩자반과 신 깍두기가 들은 도시락이지만 버티고 말했다.
『언제쯤 너는 이곳에서 밖으로 나갈 생각이냐?』
미군이 또 묻는다.
『난 곧 나갈려구 한다.』
사실은 뱃속이 꼬르륵 했었다.
나는 일어섰다. 그들도 나를 따라 나온다. 이층 층계를 내려 아래층 입구에서 한 길로 나서는 순간, 바로 그 앞을 지나는 연숙이와 마주쳤다. 그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생각하니 토요일이었다. 학교서도 춘자 「그뤂」인 그들과는 말을 잘 안하는지라 모르는 척 했다.
춘자한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연숙이의 눈에 뜨인 것이 거북하긴 하다. 혼자 가는척 하고 연숙이와는 반대쪽으로 쓱쓱 걸어가는데, 미스터 여드름과 미군이 부르며 쫓아온다. 돌아보니 연숙이가 저만큼 서서 보고있다.
『빌어먹을 계집애 뭘 보고 있어, 제 갈길이나 가지!』
하고 입속에서 욕을 하며 연숙이를 노려보았더니 전신주에 몸을 감추고 엿본다.
『정말 식사 안 할텐가?』
미군이 묻는다.
『좋다. 갑시다!』
나는 연숙이 보라는듯이 미군과 나란히 서서 갔다.
양식점에 들어가서 「비푸 카스」를 먹었다. 오래간만에 먹는 쇠고기라 각두기 반찬인 도시락에 비할게 아니었다.
『너를 만날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미군이 묻는다.
『음악당에 오면 된다』
『언제든지?』
『그렇다.』
『내 이름은 딕슨인데 잊지 않았느냐.』
『딕슨, 안다…』
헤어질 때 이렇게 말은 했지만 음악당에 다시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는 학교 간 척하고 시침을 땐 것은 물론이다.
월요일 아침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 내 마음은 다시 무거웠다. 음악당으로 가자니 미군을 만날까바 두려운 것보다 돈이 없었다. 도서관에 갈 푼돈조차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무거운 걸음으로 학교로 옮겼다.
교문에 들어서자 상학 「사이렌」이 울렸다.
교실에 들어가서 강숙의 자리를 보니, 강숙이가 웃고 있었다.
내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나는 오히려 흥과 열이 나서 첫 시간 영어공부를 했다.
선생이 나가자마자 춘자 「그룹」의 눈 뿐이 아니라 교실 전체의 눈이 나에게로 쏠리고 여기 저기서 숙덕거리는 이상한 분위기가 눈에 뜨인다.
내 뒤에 누가 있나 해서 돌아보니 벽이 있을 뿐이다.
『양키하고 다니기 바빠서 학교를 결석하니 다 됐다. 다 됐지 뭐냐?』
춘자의 목소리다. 그 옆에는 연숙이가 입을 지렁이같이 휘고 어깨너머로 곁눈질을 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교실 안의 이상한 분위기가 나를 목표로 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내장까지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교실 「또어」 옆에서 강숙이가 손짓을 하며 나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복도를 나오자, 교실 안에서 춘자들이 침을 뱉는 시늉으로
『팻! 패이다!』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온몸에 꾸중물이나 맞은것 같이 기분이 나빴다.
강숙은 아무말 않고 내 손을 붙들고 울적한 강당 모퉁이로 끌고와서 걱정스레 묻는다.
『너 토요일날, 미군하고 손잡고 다니는걸 누가 봤다는데 정말이니?』
『손을 잡고?』
『음 바싹 붙어 다녔다던데?』
나는 어이가 없어 대답조차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