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45) 편지 ③
발행일1964-04-12 [제418호, 4면]
강숙이네 집에 들렀더니 딕슨한테서 막 편지가 왔다고 하면서 가지고 나온다.
『미안하다! 너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게 해서?』
나는 입끝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별로 폐를 끼쳤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만큼 강숙이에게만은 허물이 없었다., 마치 그는 담벽과 같았다. 바람벽이면 무슨 말을 해도 좋듯이 강숙은 유일한 「나의벽」이었다.
『뭐라고 했니?』
강숙은 나와 똑같이 들여다 보고 있었으나 편지 내용을 몰랐다.
『메롱 맛 같은 사랑의 편지야…』
나는 내 마음의 문을 활짝 털어놓는 기분으로 말했다.
『「아이 러부 유」라는 말은 하나도 없는데?』
『진짜 사랑은 그런 말 안쓰는거야…』
『뭐라고 했니?』
강숙의 무딘 얼굴에도 호기심이 나타난다.
『너와 헤어진 뒤 내 머리속은 너의 일로 가득차 있었다.…… 어때?』
나는 유쾌히 웃었다.
『또?』
『내일 열두시반에 덕수궁에서 만나자는 거야!』
『……』
강숙은 말대신 표정으로 (근사한데!) 하는 뜻을 나타냈다.
『조심해라 학교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을 만나지 않도록 덕수궁 후원으로 가면 숲속이 있으니 그리로 가서 조용히 얘기해!』
『보면 어때…』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우정 이렇게 말했다.
집에 돌아온 것은 근 한시간이나 되어서 였다.
『이년아 엎어지면 코 닿는데에 담배가게가 있는데 어딜 쏘다니다가 들어오냐?』
『……』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백양을 그의 앞에 놓았다.
『말해라…』
『……』
돌같이 가만히 있었다. 변명하기도 귀찮았다.
『말 안할테냐?』
아버지는 일부러 낮은 목소로리 험악한 얼굴을 하였다. 전 만큼 무섭지가 않았다.
『말 안하면 죽일테다…』
그는 벽장속에서 다듬이 방망이를 꺼내며 위협을 했다. 전에는 얼마나 무섭던 그 방망인가?
『못나가게 하니까 밀린 볼 일 좀 보고 왔는데 뭘 야단이세요』
짐짓 내가 상을 찡그리고 짜증을 냈다.
『…그래 무슨 볼일이냐?』
아버지는 내 기세에 눌리어 말소리가 한풀 죽는다.
『학교 숙제 때문에 친구네 집에 들렀드랬어요!』
『…정말이냐?…』
아버지는 내 눈속에 숨은 거짓말을 찾아내려고 쏘아본다.
『강숙이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나는 또 한번 짜증난 얼굴로 말했다. 방망이 쥔 손이 풀린다.
(짜증이 효과가 있구나!)
속으로 웃으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속 가슴에 감추었던 딕슨의 편지를 살금 꺼내서 보다가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오길래 얼핏 감추었다.
그날밤 잠자리에서 괴괴한 틈을 타서 몇번이고 딕슨의 편지를 읽었다.
글짜 한자 한자를 외우고도 남았다.
전날의 딕슨의 얼굴은 곱살하고 상냥한 인상이었는데, 그의 의지적인 일면이 합쳐서 생각할수록 믿음직했다.
나의 외롭던 한가닥 가느단 의지는 그의 굵다란 밧줄과 합쳐서 굵은 의지로 꼬여진 것 같았다.
문득 진호와의 약속이 생각난다. 미안하지만 안가면 그만인 것이다.
이튿날 내 몸에서 새 기운이 숫구쳐서 서투른 휘파람도 불고, 노래도 불렀다.
『이봐, 나순언니 아버지가 날더러 나순이가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어!』
복순이가 내 방을 빠끔히 들여다 보며 조그맣게 말한다.
『왜?』
『나도 그렇게 보이는데?』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유쾌하다 뿐이야 … 봄날씨 같지? 아니 봄이지 뭐!』
나는 봄아가씨 꽃가마 타고 온다는 노래 귀절을 읊었다.
『아버지가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몰래 알아보래!』
『지금 대답한 대로야…』
『정말 나도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 해지네!』
복순이는 파란 하늘을 눈 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보통 열시에서 늦어도 열한시에는 나가는데 그날따라 열두시가 되이도 나갈 기색이 없다.
『아버지 안나가신다니 좀 알아봐라!』
이번에는 내가 복순이를 밀정으로 보냈다. 조금 후에 돌아온 복순의 대답은 나에게 크게 실망을 주었다.
그는 몸이 불편해서 오늘은 안나간다는 것이었다. 시간은 30분밖에 남지 않았고 몹시 초조했다.
뒷창문을 열고 뒷담을 휘이 돌아보니 내가 넘기에는 높았다.
뿐만 아니라 대낮에 옆집을 질러나가기도 부끄러웠다. 그러나 급하면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차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마당에 들리길래 문틈으로 보니 변소로 간다.
변소문이 닫치는 즉시로 나는 소리 안나게 건너방 문을 열고 나와 사뿐 사뿐 발자국을 죽이며 대문 앞에 왔다. 빗장과 고리를 푸는데까지도 소리가 안났는데 문을 열적에는 비꾹했다.
『누가 왔니?』
아버지는 변소간에서 소리친다.
나는 문턱박으로 발이 나가기가 바쁘게 뛰었다. 마침 정류장에 버스가 왔길래 숨찬것도 모르고 잡아탔다.
(이제 안심이다!)
하며 뒤로 자빠지는 우리 집 쪽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변소에서 나온 아버지가 나를 찾아 바깥까지 쫓아 나와 볼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순간 나중일을 걱정하기 보다는 딕슨과 만날 일이 머리에 가득차 있었다. 버스는 다행히 조금씩 정거하고는 불야불야 달린다.
차장도 내 마음과 같이 바쁜 모양이었다. 미도파 앞에서 내리니 꼭 열두시삼십분이었다.
덕수궁까지 총총 걸음을 놓았다.
이때 뒤에는 진호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몰랐다. 그는 바로 내 앞 버스에서 내리다가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인지 미행했던 것이었다.
입장권을 사가지고 덕수궁에 들어서니 바로 입구 가까이의 「벤취」에 딕슨이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 「벤취」에 잠시 앉았다가 연못가로 갔다.
강숙이 말대로 으슥한 후원숲속으로 갈까 하다가 누구의 눈을 두려워 할 것이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 연못가 「벤취」에 나란히 앉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내가 하려고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내가 내일이라도 집을 나와서 너한테로 찾아가고 싶은데 좋으냐?』
『집을 나오다니?』
딕슨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집에 있기가 싫어!』
『어째서?』
『있기 싫은 것이 이유야!』
『있기 싫은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런 사정이 있어!』
나는 딕슨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버릴 결심이었다. 그러나 내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 매우 난처한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한테 가면 싫으냐!』
『나는 너의 있을 곳을 마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준비를 하면 되지 않느냐 아무데라도 좋다. 부평에는 민간인 주택이 많이 있으니 방 하나를 나를 위해 빌리면 되는거다.』
『……』
딕슨은 망서리며 대답이 없다. 내가 예상한 딕슨과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