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10) 카메라와 연보금
생활비에 계상되는 연보
여기도 볼품없는 성당이
발행일1964-04-19 [제419호, 3면]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세계일주 여행의 「코스」로 구라파(덴마크)쪽에서 날아들어갓었다. 그러니까 미국의 동쪽서부터 서쪽으로 훑어보며 지나왔었지만 이번 두번째 미국행은 직접 일본에서 서쪽 「센프란치스코」로부터 거슬러 들어갔다.
주일이 되어 내 여동생과 함게 집근처에 있는 「성 에드워드」성당엘 갔다. 약 2백명 가량이 앉을 장궤틀이 준비된 아주 조그맣고 그리고 낡고 헐은 목조성당이었다.
『아니 미국에도 이렇게 초라한 성당이 다 있나?』
『이 성당은 너무 오래된 성당이어서 바로 이웃에 상당히 큰 근대식 건물을 짓고 있는 중에요.』
선녀는 성당이 초라하다고 본당교우들의 마음마저 초라하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본당교우들의 연보금으로 벽돌 한잔한장이 쌓여지고 있는 중이에』
『헌데 여기선 연보를 얼마 정도 내면 되니』
『제 성성껏 내면 되지 뭐!』
그런 할 대답이 나올 것은 알았지만 돈의 가치에 익숙지 못한 외국땅에 가면 처음 겪어야 되는 것은 정가표가 없는 그나라의 「팊」이며 연보이다.
대개 지불 요금의 1할 내지 2할을 내야 된다는 기초지식은 있었지만 구라파 같은데선 「달라」와의 환율 계산부터 시작해야 간신이 「팊」 지불액수의 계산이 나오니 얼떨덜 해지는 수가 많다.
성당에서 미사 때는 연보도 그러하다. 보통 천원을 내는데 1원을 내도 안되겠고 평균 1월을 내는 것을 천원 내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아무나 붙들고
『여보슈 연보를 얼마 내면 됩니까』하고 미사때 바치게 되는 예물의 내역을 어리석게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간신이 나는 허물없는 동생으로부터 보통 1불 내지 2불을 낸다는 소리를 들었다. 선녀는 나보고 50「센트」쯤 내면 어울릴 것이라고 일러 주기까지 했다.
「뉴욕」 「부로드웨이」 69가 성당엘 처음 갔을 때였다. 나는 복음성경 직후 회장들 네명이 걷고있는 연보 주머니에 가난한 예물을 바쳤다. 그러나 나처럼 현찰을 눈에 띄게 내놓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본당에서 만들어준 흰 봉투에 예물을 넣고 주소와 이름을 적어 내놓는다.
우리나라와 달라 이곳에서는 따로 교무금을 내질 않는다.
매주 내는 이 연보에 교무금까지 포함되어 있다.
교우들은 자기네의 1개월 생활계획 속에 성당에 얼마를 예물로 바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체를 영하러 나가야 될 때가 왔다.
그런데 한가지 분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쓰고온 이태리제 모자와 독일제 카메라를 앉은 자리에 놓고 나갔다 와야하나 들고 나가야 하나 물욕적인 분심사로 망서리게 되었다. 여자들은 예의없이 「핸드빽」을 들고 성체를 영하러 나간다.
내 바른쪽 옆에 앉은 흐름한 영감은 유난히 우리나라 대장간 영감같은 인상으로 노동복차림이어서 더욱 꺼림칙하다. 친구들의 충고소리도 떠오른다.
『아무리 좀도둑 없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뉴욕」에선 조심해야돼, 대구의 신신부님도 카메라 가방 다 도둑맞었어』
나의 분심 잡념은 영성체를 앞두고 순간적이지만 속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생각 끝에 나는 내 왼쪽에 앉은 여교우 곁에다 모자와 카메라를 두고 성체를 영하러 나갔다.
『주여 너 내마음에 나오시기에 나 어찌 합당하오리까마는 주는 한말씀으로만 명하시면, 내 영혼이 즉시 나으리이다.』
이 기구문에 힘을 들일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영성체가 끝나자 전교지방으루이한 연보주머니가 또 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내가 마음속으로 은밀히 의심(?)을 품었던 그 대장간쟁이 영감님이 넝마같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10「달라」를 꺼내 놓으면서 5「달라」를 거스러 달라고 한다.
거스름 돈을 달라고 한 점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전교지방을 위해 남의 몇배 되는 돈을 내놓은 점이다. 그 노인네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 「내 카메라와 내 모자」만을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럽게 여겨졌는지 모른다. 그는 「자기의 옷」에 무관심하면서 우리나라 같은 전교지방을 위해 돈을 내놓은 그 노인에게 「보쌀리노」 모자와 「라이카」카메라에 집요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