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46) 편지④
발행일1964-04-19 [제419호, 4면]
나는 믿었던 기둥이 갑자기 얄삭해지고 흔들거리는 느낌이 왔다.
『너는 이 연못에 핀 연꽃을 본 일이 있느냐?』
딕슨을 보지 않고 멀거니 물위에 시선을 준 채 물었다.
『작년 여름에 본 일이 있다. 매우 아름답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너와 사귈 수록 너의 인상은 연꽃을 연상케 한다!』
딕슨은 열정적으로 말하였지만, 나에게는 별로 감응이 없었다.
『너는 군인으로서 용기가 있느냐?』
나는 여전히 그에게는 외면을 하고 말했다.
『용기? 용기가 없어 보이느냐? 남만큼은 용기가 있다고 나 스스로 믿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용기가 없어 보인다.』
나는 옆에 앉은 그를 돌아보았다.
『무엇이 너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하느냐?』
『너는 내가 너의 부대로 찾아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준비 없이 너를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느냐?』
『……』
나는 아무말 않고 물위를 바라보며 혼자 속으로 말했다.
『바보 자식, 준비는 무슨 준비야, 제가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든지 책임을 져보려고는 하지 않고!』
『너는 왜 집을 나오려고 하느냐…』
『…네 곁이 좋아서 그렇다!』
나는 웃지 않고 말했다.
『나도 언제나 너의 곁에 너와 함께 잇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근무에 종사하는 몸이다. 그리고 너는 학생이다. 우리는 당분간 각자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 당장 갈 곳이 없다!』
『그게 무슨 뜻이냐?』
『우리 아버지는 너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몰래 탈출해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너는 너의 아버지에게 우리의 사이가 진정이라는 것을 잘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설명을 들을 귀를 갖지 않았다.』
『너의 아버지는 완고하냐?』
『그렇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난 지금 시간이 없다. 세시까지는 부대에 돌아가야 한다. 준비되는대로 너에게 편지를 하겠다.』
딕슨은 시계를 보며 일어선다.
그는 덕수궁 앞으로 오기로 되어있다는 군용 찦차가 오기까지, 편지하겠다는 말을 거듭하고는 미군들이 서넛명 탄 찦차에 올라타고 떠나버렸다. 딕슨은 몇번이나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들어 답을 보냈다.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미스양…』
하고, 날카로운 음성이 뒤 꼭지에서 났다. 진호가 험악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나는 가슴이 덜컥했다.
『약속을 못지켜서 미안해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양키하고 덕수궁에서 만나 무슨 얘기를 했어?』
그의 어조는 형사가 문초라도 하는듯이 날카로왔다.
『우연히 덕수궁서 만난거야요!』
『한 사람은 와서 기다리고 한 사람은 찾아가는 것이 우연인가?』
『…아니, 김진호씨는 토론횐지 강연횐지 자기 갈 곳에 갈 일이지 인제 보니 여학생의 꽁무니를 쫓아 다녔나봐?』
『여학생의 꽁무니를 따라왔다구? 미스양이길래 뒤를 미행한거야. 나는 미스양의 마음을 구하고 싶었어!』
잘보니 진호의 성난 눈초리 속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은… 딕슨한테 부탁이 있었어요!』
『무슨 부탁?』
『미군부대에 취직이나 좀 할려구!』
『학교는 어떻게 하구?』
『학교 그만둘까 해요!』
『왜?』
『그만한 사정이 있다는건만 알아주세요!』
『갑시다…』
진호는 마치 잘못한 누이동생이나 잡아끌듯이 내 팔을 잡는다.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어디로 가자는 거야요?』
『학생토론회에 가십시다…』
『난 그런거 흥미없어요.』
『가면서 내가 얘기할 것도 있어…』
진호의 말투는 제법 명령적이었다.
반발심이 생겼으나, 무언지 모르게 끌리었다. 진호한테 보낸 편지에 대한 책임감도 없지 않았다.
이 기회에 딕슨과 나 사이를 확실히 인식시켜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스 양!』
진호는 걸으면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는 여성에게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기는 미스양이 처음이야! 딴 여자 같으면 내 일을 제쳐놓고 뒤를 따라가지는 않았을거야! 미도파 앞에서 버스를 내려 길을 건느려고 보니 미스양이 경향신문사 쪽으로 가지 않아? 나와 약속은 잊고 어딜가는 것인가, 의아했어! 마침 신호는 파랑인데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어! 어쩐지 나순의 뒷모양이 궁금했어,
그렇게 만난 것은 천주님이 미스양을 지켜주라는 분부로 알고 나는 뒤를 따른거야. 아니나 다를까? 따라가보니 길잃은 양이였어… 』
『나는 처음부터 길잃은 양이야요…』
『딕슨에게서 무얼 얻었어? 쪼코렡? 「달라」? 그런것에 유혹당해서는 안돼! 알았어, 미스양?』
너무 사람을 어린애 취급을 하는지라 나는 화가 무척 났지만 우정 눈을 똑바로 뜨고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난 초코렡도 좋고 「달라」도 좋은 걸 어떻게?』
『본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야?』
『나는 옛날옛적부터 길 잃은 양인걸요, 목자님 나는 오늘 당장 잠잘자리와 먹을 양식거리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지?』
『미스양은 그걸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진호는 입술을 고재껍질 같이 다물고 쏘아본다.
『거짓말 아니야요. 나는 오늘이라도 어디론지 정처없이 가버릴까 해!』
이렇게 말을 하고 나니 어쩐지 내 자신 문득 을씨년스럽고도 슬픈 기분이 든다.
『…아버지와 맞지 않아서?』
『우리 아버지를 아시죠?』
『…그러나 참아야지…』
『참을만큼 참다가 참을 힘이 모자라는 때는 어떻게 하지요?』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켜주는 아버지 옆인데, 참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 그리 많담, 참을 수 있어…』
『……』
『…나는 내 힘으로 공부하고 있어, 그래도 나는 명랑한 얼굴로 견디어 나가고 있어!』
『못먹이고 못입히고 학교에 못보내주어도 좋아요, 내가 바라는 것은… 따듯한 애정이야…』
『…………』
진호는 놀란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도 이 세상에서 모자라는 사랑은 주님께 바라고 있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있어요. 그러나 나 하고 토론회에 참석해요. 한가지 말이라도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줄 것이야요!』
나는 정말 길 잃은 양과 같은 기분으로 진호를 따라 대학 · 고교생들이 모인 토론회장으로 들어갔다.
열댓명 쯤 되는 남녀 학생들과 그밖에 대학교수인듯한 중년 신사 두어 사람과 신부도 한분 참석한 가운데, 이미 토론회는 시작되어 있었다.
연제는 「청년의 고민과 가톨릭 정신」이라는 것이었다. 진호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이따금 나를 힐긋 돌아보았다. 나는 처음에는 듣다가 차차 내 자신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어디론지 가버릴까? 아버지의 사나운 눈초리를 생각하니, 집으로 갈 마음이 안난다. 그렇다고 갈 곳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