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夜話(문학야화) - 20世紀 西歐作家(서구작가)들 (3) 고리끼의 「푸른고양이」
발행일1964-04-19 [제419호, 4면]
作家
막심 고리끼(1868-1936) 그의 본 이름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이다. 고리끼는 그의 필명(筆名)인 것이다. 그는 러시아 혁명 전 중요작가의 위치를 차지했었으며 혁명후 소베트 치하(治下)에서도 작품활동을 계속한 유일한 작가였다.
소설 단편 및 극작을 통해 작가로서의 내관(內觀)을 추구하면서 인간을 이해해갔고 거기 따르는 우울같은 것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저변(底邊)을 흐르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슬라브」인들의 기질(氣質)을 말하고 있는데 주목할만하다.
제19세기의 위대한 러시아의 작가들은 「인간」에 대한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사랑했으며 자기들의 작품활동은 곧 인격(人格)의 반영으로서의 건전한 바탕을 지니고 있었다. 고리끼의 사상은 역시 그러한 원줄기를 타고 인류의 가족 즉 모든 사람에게는 한 인간의 피가 흐른다는 이상(理想) 속에 살고저 했다. 어떤 불우한 환경, 비록 부당한 처우를 받는다 해서 그 큰 이상에 금이가게 할 순 없다는 것을 믿고있다. (그는 불우한 환경서 자라났다.) 문학인의 긍지를 가진 고리끼의 작품태도는 언제나 담담했다. 그러나 인간성의 어떤 절실한데를 예의관찰하여 그것을 높은 문학적 분위기로 강조하고 폭로하는데 가서는 통렬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의 필명 막심 고리끼의 듯이 「痛烈한 秘話)인 것도 흥미있다.
作品
작품 「푸른 고양이」는 처참하고 또 무미건조한 죄수들의 생활을 한 「멜로 드라마」로 엮은 것이다. 다 읽은 후에 생각케 해주는 것은 그런 생활은 어디서나 있겠다는 함축성을 잊지 못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죄수들이 양지 바른 감옥 뜰에 몰려 나와서는 고양이 한마리를 서로 안으려 하고 분주히 쓰담는다. 『풋시(고양이 이름)아 요것아!』
『요 기름기 좀 봐』
『콩나물 자라는 같구나, 이런! 앞발톱, 제법인데』
『그러지들 말아요, 제대로도 좀 놀게 해주구려』
그래도 못내 안아주고 만져주고 제대로 두질 않는다.
허나 주인공은 「푸른 고양이」가 아니다. 자츠브리나 라는 키가 잘막하고 완강히 생긴 익살꾼이다. 그들은 그를 중심으로 모이고 그의 웃음, 그의 몸짓에 말려들어 웃음을 핀다
그의 웃음웅변은 끝이 없다. 누가 감히 거들 사람도 없다. 그렇게 저항도 없이 웃어주고 웃어야 한다. 그는 샘솟는 저력을 가지고 웃음을 엮어간다. 마치 고된 노력(勞力)을 바치듯 새로 또 새로 익살을 부려야 한다. 몸짓 차례로 들어가면, 땅을 차며 뛰고 앉았다. 또 치솟아 올라야 한다 비지땀을 흠뻑, 이 지경이 되면 제길에 뛰노는 것이다. 누구와 웃자는게 아니다. 듣는 축들도 웃다가 지치고 그래도 힘자랄데 까지는 껄껄 그려본다. 마치 막힘을 다해서-.
결국 고리끼는 이 평범한 이야기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주인공 자츠브리나를 감옥 안에 집어넣고 흔히 감옥의 울타리 한겹을 가지고 격세의 차를 차리기 쉬운 사람들의 천박한 인식을 비웃었던 것이다.
작품 끝장에 가서 『고양인 벌써 사라졌다. 그리고 자츠브리나에게는 그와 죄수들 간을 갈라놓는 대적(對敵)이 없다』고 몇줄로 작품의 전모를 설명했다.
그 함축성은 그의 고상한 문학적 향기와 함께 독자를 사로잡아간다. 죄수들의 고양이 쓰다듬는 이야기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되었다. 고리끼 자신도 주인공 아닌 그것을 소설의 제목으로 삼을만큼. 왜 그들은 고양일 붙들고 애정을 쏟듯 했던가? 그 뒷말을 얼마든지 달 수 있는 여백이 있다. (ㄷ·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