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천주께서 에덴동산에서 그 가운데 한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아담에게 명령한 것은 아담의 순명정신과 사랑을 알아보기 위한 하나의 시험이었읍니다. 아담이 범한 죄는 첫째로 불순명의 죄라고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 무엇보다도 아들로 삼는 영화로운 특전까지 주신 천주께 대한 거역의 죄였다고 보아야합니다.
아담의 죄의 나쁜 점은 자기의 사랑하올 아버지이신 천주께 대한 배은망덕에 있는 것이며 이런 까닭에 그가 받은 벌은 그렇듯 엄하였고 또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읍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천주께서 아담에게 주신 그 특은들을 그 후손들에게까지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만일 천주께 내내 충실하였더라면 모든 사람이 그 덕을 보게되었을 것이고 그가 받았던 모든 은혜들을 받았을 것이었읍니다.
그와 마찬가지 이유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아담 한 사람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인 온 인류가 천주님한테서 내침을 받게 되었고 사람이 결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천주님과 사람과이 사이에 생겼던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의 아무 공로도 없이 천주께 은혜로 얻었던 천주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스스로 팽개처버린 것이었으며 자기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것을 도로 찾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이 범죄로써 받게된 쓰라린 조건이었읍니다.
아담은 자기 잘못으로 인하여 천주님을 떠난 것이며 그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희망도 없었으며 오직 절망만이 있을 뿐이었읍니다.
천주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쫓기는 하셨으나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훗날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였읍니다.
구세주에 대한 이 희망은 아담이 자기죄의 결과로 생긴 생활의 고난 속에서도 참고 지낼 수 있게 해주었읍니다. 그의 자손들도 천주님의 이 약속을 보존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고대하고 살았읍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배상으로 천주께 제사를 바치곤 했읍니다.
이들의 제사에는 빈약하고 불충분한 제물인 과실들과 동물들이었으며 천주님의 상한 정의를 충분히 보상할 수 없는 죄많은 사람에 의해서 바쳐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님을 숭배하려는 그의 충동은 매우 강력하고 그들의 좌과에 대한 생각과 구원에 대한 갈망은 매우 깊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세기를 두고 자기들의 과일과 동물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것을 골라서 천주께 제물로 바치며 자기들을 천주님과 화해시켜 주실 구세주께서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읍니다.
천주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고 죽으심으로써 사람과 천주님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게 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참 사랑이시기 때문에 온 인류의 명의로 배상의 희생을 드릴 수가 있었고 또한 그는 참 천주이시기 때문에 그의 희생은 그의 지위에서 생기는 무한한 가치로 아담의 죄와 온 인류의 죄를 완전히 보상할 수가 있었읍니다.
예수님이 바차신 희생으로 우리는 천주의 자녀로 살 수 있게 되고 천주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시어 우리를 구속하시옵니다.(中略)
예수께서는 한번 오직 한번만 죽으셨읍니다. 그러나 유일하고 무한한 이 희생은 피 흐름이 없는 방법으로 매일 우리의 제대위에서 다시 되풀이되고 있읍니다. 그것은 예수의 분부에 의한 것으로서 우리와 또한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께서 성부께 바치시는 그 제사에 그와 더불어 참예할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따라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공로를 받을 수 있기 위함입니다. (中略)
이런 이유로 인해서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바치신 희생의 피흐름이 없는 재현입니다. 미사와 십자가상의 제사와는 똑같은 것입니다. 매일 우리의 제대위에서 거행되는 희생과 「갈바리아」 산위에서 있었던 희생과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는 오직 피흐름이 없다는 것을 떼놓고는 모든 점에 있어서 「갈바리아」 산 위에서의 제사와 똑같은 제사입니다. (中略)
이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할 때에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는지가 명백하지 않습니까? 미사에 한번 참례하는 그 가치가 어떤지를 생각하면 우리 마음에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있읍니까? 우리는 「갈바리아」 산 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눈앞에 보며 그 곁에 있었으면서도 지루함을 느끼고 예수의 죽으심이 빨리 끝나서 다른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릴 수가 있겠읍니까? 분명히 우리는 그럴리가 없읍니다. 미사가 실제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희생의 재현이 된다는 것을 아는 진정한 가톨릭신자에게는 미사때에 이런 감이 결코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될 것입니다.
柳 프레드릭 神父(청주 서운동본당 주임, 메리놀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