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47) 편지 ⑤
발행일1964-04-26 [제420호, 4면]
토론회가 필한 것은 다섯시 쯤이었다. 지루한 토론회였으나 나는 오히려 더 앉아있고 싶었다. 토론회의 연사의 한사람이었던 키가 작달막하고 똘똘한 학생이 나를 힐긋 힐긋 보며 뽑내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열띤 연설도 듣지 않았거니와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진호와 그 똘똘이 학생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밖으로 걸어나왔다.
『어디로 갈까?』
어느 길이나 나에게는 똑같았기에 아랫길로 걸엇다. 걷는다니 보다 발이 서서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발은 무신경한 동물 같았다. 그건 내머리가 명령하는대로 움직일뿐이다. 고민에 가득찬 머리보다 발은 행복해 보였다. 만약 가능하다면 발 속에 내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길가의 대폿집 진열장에는 양념에 저려논 고기와 생선이 쟁반에 가득히 담겨있고 술집 안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미스양…』
뛰어 오는 발걸음 소리가 나길래 돌아보니 진호였다.
『어디가?』
『그냥 따라가는거야요.』
『누구를?』
『발걸음을!』
『…정말 오늘 집에 안들어갈 생각이야?』
『난 집 없어!』
길가는 여성들의 멋지게 차린 유행 「수쓰」를 멀거니 보며 나는 대답했다.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돈 있어?』
『음…』
『가난한 고학생이 웬 돈?』
『책살 돈인데… 괜찮아…』
진호는 국립극장 앞에 즐비한 한 음식점으로 앞서서 들어간다.
진호가 뭘 먹셌느냐고 묻기에 벽에 걸린 「메뉴」를 한참 보니 먹고픈 것은 불고기였다. 값이 비싸지만 시침을 떼고 말했다.
진호는 불고기 백반 일인분과 「오무라이스」를 청했다. 「오무라이스」는 이십원이 쌌다.
『불고기 좋아 안하셔?』
『난 좋고 싫은거 없어!』
『그럼 왜 불고기를 하시지 않구?』
『「오무라이스」면 나에게는 충분해!』
『…불고기는 비싸서?』
『…아니!』
진호는 고개를 저었으나 순간 얼굴이 밝애진다.
『그럼 나도 「오무라이스」를 할걸 그랬나봐!』
『아냐, 이스양은 그 이상의 것도 먹겠다면 애끼지 않고 돈 낼테야…』
진호는 웃지 않고 말한다.
나는 진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책 살 돈 써버리면 어떻가죠?』
『그런 걱정은 미스양이 안해도 좋아!』
진호는 성난듯한 표정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 내가 그럴 사람인줄 알아?』
진호는 눈 똑바로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입을 맘껏 벌리고 콧물을 씻어가며 고기는 물론 김치 깍두기까지 바닥이 보이도록 실컷 먹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진호가 싱긋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군?』
『점심도 못먹은걸요!』
『나는 노상 점심을 안먹는데?』
『용케 견디네?』
『습관이 되었서!』
식사가 끝난뒤 물을 들이키며 삼십분이 지나도록 나는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나가지?』
『더 앉아 있어요?』
나는 웃었다. 배가 부르니까 고민의 절반은 누가 덜어간 것만 같았다.
『내가 집에 바라다 줄까? …아버지를 만나서 얘기해볼까?』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근 한시간이나 있다 밖에 나오는 거리는 황혼이었다.
『어떻게 할테야?』
진호는 걱정스러이 묻는다.
『혼자 걸으면서 생각해 볼테야!』
『과외공부만 아니면 같이 의논하고 싶은데!』
진호는 파출소의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어서가서 과외공부 시키세요!』
진호는 망서리는 표정이더니
『오늘은 과외공부를 희생할테야!』한다.
『왜?』
『길 잃은 양을 버리고 갈 수는 없어!』
진호와 같이 걸으면서, 누가 보면 사랑하는 사이라고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독을 함께 나누어 주는 진호가 고마왔고,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진호는 한동안 말이 없이 걷고 있었다. 뭘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책 살돈 쓴거 후회하고 있었죠?』
『바보! 주님께 미스양을 지켜주십사고 기구했었서… 우리 집이 누추하지만 정 그렇다면 우리집에 갈까. 방하나는 남에게 전세주고 , 방하나를 양친과 셋이서 쓰는데 급한대로 끼어 잘 수는 있겠어?』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야단 안하실까?』
『내가 우기면 돼…』
『…그만큼 양식이 축낡서 아냐요?』
『비지국이나 수제비라도 먹는데로 먹겠다면야 괜찮아!』
나는 이때 진호는 볼상보다 내면은 강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어둑한 길에서는 진호의 팔에 매달려서 걸었다.
그리고 노래까지 무심코 읊었다가 얼핏 입을 다물었다. 내 노래는 상당히 비음악적이기 때문에.
『집에 갈 용기가 생겼어?』
진호가 반색하며 묻는다.
『아니…… 이 순간이 좋아서!』
『미스양! 내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될때 까지만 견디어 알겠어…』
『음! 기다릴테야…』
딕슨이란 존재가 머리를 스쳤지만 진호의 진심이 나를 더 힘차게 붙들었다.
『나 집으로 들어갈까?』
『그래, 그게 좋아!』
이렇게 내가 결심한 것은 밤 열시가 되어서였다.
『앞날의 희망이 견딜 힘을 우리에게 주는거야, 안그래?』
진호가 다정히 내손목을 쥐며 말한다.
『음, 나도 겨우 견딜 힘이 생겼어!』
우리는 이제 시간을 아끼듯이 불야 불야 버스를 탔다.
버스가 집근처에 가까이 오자 내 마음은 다시 불안해졌다.
진호는 우리집이 보이는 골목까지 나를 바라다 주었다.
『이젠 가세요.』
『들어가는걸 보구』
『싫어, 가세요.』
나는 욕먹고 얻어맞는 소리를 진호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진호는 내 기색에 질리어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우리집 문앞까지 살금살금 소리안나게 다가와서 여느때 모양 안의 기색을 엿보았다. 잠잠한 가운데에 아버지의 가벼운 기침 소리와 침뱉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마루턱에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침소리에 놀라 문앞에서 도망을 쳤다.
백「미터」쯤 거리에 와서 한숨을 돌리다가 다시 한걸음 다가갔다. 이 사이 진호의 얼굴이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드디어 문앞에 이르자 문을 밀었다. 문은 잠기지 않고 열려 있었다.
『누구냐? 나순이냐?』
삐걱 소리가 나자 금방 아버지의 날카로운 음성이 튀어나왓다.
『네에~』
이순간 나는 문득 한 생각이 들어 무턱에서 펙하고 쓸어지는 시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