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次(차) 會期(회기)에 무엇을 바라는가
敎會는 이 時代의 現在요 行動이다
寬容으로 現實 보살펴야
啓示問題 等 敎理로 宣布 않을듯
새 술은 새 가족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 하느니라 (마태오 9장 17절)
발행일1963-10-13 [제394호, 2면]
분도회원 플라시드.죠르단 神父 記 바오로 6세 교황의 역사적 대관식 대례미사는 성 베드루 대성당 정문 돌층계에서 거행되었었는데 그것은 합송(合송-對話)미사였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어떤 공식성명보다, 보다 큰 감명을 받았다. 그 장소가 성당안이 아니라 성당 밖이었다. 요안 23세의 심중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이태리말 「아뻬르뚜라」(APERTURA) 즉 교회가 살아가는 세대와의 밀접한 접촉을 추진하고 동시에 모든 선의(善意)의 사람들과 자유로히 견해를 교환해 간다는 뜻이겠다.
그간 바오로 6세에게서 받은 인상만으로도 그는 대화(對話)의 교황님이라고 할만하다. 필자는 그를 성청 국무차관 재임시에 마난 일이 있다. 당시 NBC 방송에 종사하면서 「바티깐」 방송을 자주 취급했었다. 그 무렵 그는 이 영도(永都)의 방송 「프로」가 좀 더 세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푸념하던 것을 기억한다.
①듣기 좋아하는 사람 그는 남의 말을 잘 분간해서 듣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측근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바다. 그는 누구의 말이라도 잘 들으려 하는 모습이 역연하다. 그뿐 아니다. 그는 아무리 오랜 말이라도 끝까지 들으려하고 우정 그러한 듣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듣기 좋아하는 그는 방문객이 가능한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놓게 마련해 놓는다고 한다. 먼저 충분히 듣는 그의 주장은 한 가지 결정에 앞서 전체적인 견해를 남김 없이 듣고 있다.
사실 남의 견해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히 인내(忍耐)의 덕이다.
이것이 이번 회기의 바오로 교황의 「리더슆」을 장만해줄 것인줄 알고 있다. 이런 의미로 그의 「리더슆」은 그의 선임자 요안 23세처럼 어떤 순간에 굉장한 결정을 내리던거와 퍽 대조적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번 공의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된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제1회기를 지배한 정신 또는 그 분위기란 것은 요안 23세의 흉중을 털어놓은 현대적응(現代適應 AGGIORNAMENTO)이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터이다. 교회의 문들을 활짞 열어재치고 참신한 공기를 방 안 구석구석이 들여보내자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실로 방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가토리시즘」의 위치를 그만큼 방대한 범위에서 재검토하고 다른 신앙간에 부드러운 공기를 장만해가야 했었다.
이런 방대한 과업은 눈을 휘둥그렇게 할만한 발전이었다. 첫째 우선은 공의회 교부들이 이런 문제들에 익숙해질만한 시간의 여유가 필요했었다. 2개월이란 시일은 토의과정의 시초가 되는 각양각색의 당면한 문제들을 알아보기에 너무나 숨가쁜 기간이었다.
②상장될 의제들
이번 회기는 약 9주간이다. 이 기간에 소여의 의제들을 다 토의하지는 못할 것이다.
제3회기가 내년 부활 후에 제4회기가 가을쯤 재개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이번 공의회가 언제 종결된다는 것은 예상을 불허한다. 저 「뜨리덴띠노」 공의회는 18년을 소요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반드시 반복되는 전례로 내세울 수는 없지만.
상정될 의제가 총 17 의안인 것은 이미 발표된 것이다. 허나 새 제의도 나올 수 있다. (50 공의회 교부들의 동의로 제의될 수 있다.)
계시(啓示) 문제는 여전히 가장 많은 토의를 요하는 의제가 될 것은 뻔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예시안은 상장되더라도 토의를 다음 회기로 연장해서 좀 더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려 할 것이라는 관측을 하고 있다. 「천주의 계시」는 바로 신앙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는 거룩히 전래(傳來)되어 온 것이다. 우리 가톨릭자에 있어서 교회는 성신의 감도(感導)하심을 받아 유효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이다. 「프로테스탄」들은 개인의 최선의 판단에 따라 적당히 성경을 주석해갈 수 있다. 그렇게 자유로운 성경의 해석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러면 어디다가 그 선(線)을 그을 수 있는가? 여기 가톨릭은 전통이 생동(生動)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최초 천주의 말씀이 구전(口傳)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경외서(經外書)들도 그 확실성과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적절한 이해(理解)를 위해 신자들의 안전한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천주성신의 인도를 받는 교회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성경 및 성전(聖傳)에 대해 얼마나 많은 논란(論難)이 있음을 간단히 말할 길은 없다. 그같은 논란을 단지 신학자들의 하는 일로 미루기에는 일반 신자들의 관심은 너무나 크다고 하겠다. 공의회의 교부들이라 할지라도 이 큰 문제에 어떤 원대한 연구의 일반적 지침(指針)은 세울 수 있겠으나 공의회에서 바로 이것을 투표로 결정하고 곧 교리(敎理)로 선포(宣布)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방금 토의되고 있는 「교회」에 관한 토의도 매우 중요하다. 여기 대해서도 원칙 문제를 포함하는 일반적인 문제를 위주로 삼겠지만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및 무류권(無謬權)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혀놓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의회의 교부들 가운데는 특별히 주교들이 곧 종도의 합법적 후계자인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적어도 베드루좌(座)의 권한과 책임을 주교들에게 나누어 놓자는 것을 암시한다.
중앙집권(中央集權)을 지방분권(地方分權)으로 바꾸어 그로조차 더 많은 지방의 발전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권리의 주장이나 이동(移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어떤 종적(縱的)인 관념과 대조하여 횡적(橫的)인 관념을 가진 것으로 전자의 집중(集中)에 비겨 어떤 복합(複合)을 꾀한 발달된 꼴(形態)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성장과 중대성에 대해서도 어떤 획기적인 단안을 내리게 될 것이다. 평신도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체(神秘體)의 일원으로서의 그 존엄(尊嚴)을 자각한데서 비롯한 이 문제야말로 이번 공의회의 한 특색을 장만하겠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줄거리만 가지고서도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의회의 진척을 바라볼 수 있다.
②새 것을 향해서
어떤 시대와 융합하는 문제, 즉 가변성(可變性)이 있는 문제를 취급하기에 더욱 치밀한 연구가 필요한 것임을 더 말할 것 없다.
그것들이 한같 「뉴쓰」처럼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오로 교황은 신중히 그리고 인내성 있게 대해 나가고 있다. 선 교황은 어떤 문제에도 강요(强要)한 일이 없다. 바오로 교황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대화만을 강조할 것이다. 또 1차 회기 때의 분위기를 뒤집어 놓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하여 다수 교부들의 뜻을 살리는데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공의회의 교부들이 곧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하나니라』(마테오 9-17) 하신 말씀을 실현할 수 있게 해놓을 것이다. 오래 양조된 좋은 술을 새 가죽 부대에 담는다는 것은 신앙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도 새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교회는 이 시대의 언어를 빌려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프랑스의 리에나르 추기경은 『천주성신은 교회가 과거에 성취한 그 위에 잠들어 있기를 허락하지 않는 자이시다. 그는 부단히 교회의 생명을 재신(再新)하는 힘을 꺾지 않는다』고 했다. 공의회의 전모를 잘 표현한 말인줄 안다.
열일곱번째 공의회 의제는 『현대의 현존(現存)과 교회의 활동에 관해서』이다. 물론 이것이 3차 회기 이전으로 토의될 것 같지 않다. 그 제목만이라도 참공의회의 전 윤곽을 그린듯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이 있다. 교회는 결코 과거에 고착되어져 있을 수 없다. 교회는 이 시대의 현재요 행동이어야 한다. 그 때문에, 인간의, 권리, 결혼, 가족 인구과잉, 남녀동등권 사회정의(社會正義), 국가와의 관계, 국가협조와 세계평화 그밖에 그 중에서 가장 중대한 일이며 근본적인 관용(寬容)의 덕을 가지고 현실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④전인류의 문제로서 공의회가 취급하는 문제는 가톨릭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의 긴요한 문제들인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관용함이 절실히 요청된다. 관용은 곧 사람들의 단견(短見)을 보충해 준다. 남을 살펴보는 눈을 줄 뿐 아니라 남의 좋은 것을 받아들이게도 해준다.
공의회 개회에 즈음하여 이미 이런 점은 충분히 지적되었다. 우리는 지도자들의 먼 안목(眼目)과 그 「비죤」에 다만 고개숙일 뿐이다.
바오로 6세 교황은 그가 아직 「밀라노」의 대주교로 재임시, 1957년 「로마」에서 개최된 평신도 사도직 세계대회에 『세계를 정복하려는 가톨릭은 반드시 이 세계를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사랑은 법의 충족(로마서 13-10)이라고 한 말씀을 조차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자가 되는 길목을 크게 닦자는 것이 이번 공의회라고 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