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21) 딕슨 ②
발행일1963-10-13 [제394호, 4면]
몇 시간 후에는 내가 미군과 같이 걷고 있던 사실이 이미 남의 눈에 뜨인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허구 많은 사람 중에 하필 훈육 주임 C 선생이 보았던 것이다.
내가 딕슨과 함께 걸어간 길은, 종현 성당의 바오로 수녀원의 육중한 벽돌 건물이, 언덕 모서리에서 좁은 길을 향하여 위태롭게 빚어나온듯이 바라다 보이는, 충무로 2가에서 3가로 가는 구질구질한 뒷길이었다. 퇴계로로 빠져서 버스를 타면 집으로 곧장 가는 것을, 딕슨이 따라오는 바람에 으슥한 뒷골목으로 발걸음을 맡겼던 것이었다.
충무로는 1가에서 2가까지는 라디오 상점 움식점 「케잌」점 가구점 「호텔」 은행 다방들이 있는 산뜻한 「빌딩」들이 줄지어 있지만 2가 고개만 넘으면 구저분한 부엌 바닥같은 질벅거리는 흙땅을 끼고 판자 국수집 일그러진 옛날 일본가옥들이 느닷없이 부비적거리고 있으며 행인도 드문 쓸쓸한 곳이다. 학생이나 산뜻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은 거의 지나다니지를 않는다. 나는 맘놓고 딕슨과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친절히 대해주는 것도 싫지 않았지만, 그와 얘기하는 동안에 영어공부가 되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가끔 문장구성에 자신이 없어 되는대로 주어대면,
『뭐라고 했느냐? 무슨 뜻이냐?』
하고 그는 반문했다. 몸짓 손짓까지 보태서 거듭 말을 하면
『아하, 네가 말한 것은 이런 뜻이냐!』
하고, 올바른 영어를 가르쳐 준다. 그렇게 해서 들은 말은 쏙쏙 귀에 들어오는 맛이 있었다.
우리는 중부경찰서가 내려다보이는 윗길을 지나고 있을 때 C선생은 강숙과 강숙의 육촌오빠인 M씨와 셋이서 중부서쪽에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물론 강숙이었다. 그런줄 모르는 나는 충무로 4가 근처까지 와서 딕슨과 헤어질려고 했더니
『너의 집까지 바라다 주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어린 아이가 아니니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웃으며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럼 너의 주소를 가르쳐다오. 편지라도 하고 싶다.』
처음에는 귀찮스럽기도 했지만 미군은 애원이나 하는듯이 상량한 눈을 껌벅거린다. 처음에는 그 파란 구술눈 속의 표정을 잘 알 수 없었는데 그가 어딘지 순진해 보였다.
『그럼 다음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음악 감상실에서 만나지…』
나의 이 말은 반드시 허튼 약속은 아니었다. 은근히 가리라고 맘을 먹었다.
딕슨은 매우 기뻐하며 약속을 잊지 말라고 다짐을 한다. 그는 내가 버스타는데까지 바라다 주겠다는걸
『나는 원치 않는다…』
하고 딱 잘라 밀어버렸다.
버스를 타는데서 전송을 한다면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었다.
밤 아홉시쯤 공부도 별로 할 게 없어서 소설책을 읽고있자니 밖에서 강숙이가 찾는다. 나가보니 강숙이가 걱정스러히 딕슨과 같이 가던 이야기를 꺼낸다.
『난 아무도 못 본줄 알았는데 하필 훈육 주임 선생의 눈에 뜨일건 뭐니?』
나도 좀 깨름했다.
『어서 만났니?』
『아버지 심부름 갔다가 음악 감상실 앞에서 만났어…』
『C 선생이 오늘 너 학교에 왔더냐고 묻겠지?』
『그래 뭐라구 그랬니』
『왔다고도 할 수 없고 안 왔다고도 할 수 없어 모른다고 그랬지』
『아버지가 앓으셔서 결석한거야』
『내일 학교에 가면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애! 미리 대답할 준비 다 해 가지고 가라!』
『사실대로 얘기하지 뭐, 겁날 것 없어. 만약 길에서 아는 한국 군인을 만나서 같이 갔다면 어떻허니? 그건 문제가 안 되지? 왜 미군하고 만나서 조금 걸으면, 그건 문제가 되니?』
『정말, 너의 아버지 앓으셨니?』
『너도 날 의심하니?』
『나도 선듯 보았을 때는 의심이 갈 번 했다!』
『어떻게 돼서 너 C 선생하고 같이 그쪽에서 왔니?』
『음, 그런 까닭이 있어……』
강순은 웃음을 먹음으며 말을 했다.
『…우리 육촌 오빠하고, 훈육 주임 뚱보하고 결혼 말이 있어…』
『어마. 훈육 주임 여태 시집 안 갔니?』
『「올드미스」야…』
『몇살인데…』
『서른 여섯이라나바. 정말은 서른 일곱인데, 한 살 속인다는 말도 있어…』
『너의 육촌 오빠는 몇 살인데?』
『마흔 두살인데, 노총각이야…』
『그럼 안성맞춤이구나…』
『우리 오빠는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애. 당분간 교제해 볼 모양이야. 오늘 명동성당에서 종교철학강연회가 있었거든. 우리 오빠는 가톨릭 신자고, 강연회의 사회를 맡아보고 있었어. 나는 나대로 오빠헌테 좀 볼 일이 있어서 가는데, 명동에서 C 선생과 마주쳤어. 그 때까지는 내가 M씨의 친척이라는걸 몰랐지. C 선생이 날 보고 뭐란지 알아? 『난 종교철학에 대해서 연구할 점이 있어. 강연을 들으러 왔는데 너의들에게는 어렵지 않겠느냐?』
『그래 뭐랬니?』
『오빠 이름을 대고 집의 심부름 왔다고 그랬지… 그러니까 얼굴이 빨개지고 깜짝 놀라지 않아. M씨가 너의 육촌 오빠니 하고 홋홋!』
『그래서 강연 끝나고 같이 걸어나오는 길이었니?』
『C 선생은 나를 뗴어버리고 싶어 애를 쓰지 않겠니! 시장할테니 일찍암치 집에 가라니, 숙제가 많지 않니…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드라!』
『「올드미스」 연애하는데 슬그머니 비켜주지…』
『내 사명이 있어 간걸 나는 C 선생을 떼어버리고 오빠하고 얘기할께 있었지. 뭔고하니 결혼 후보자가 또 하나 나타났단 말야. C 선생보다는 젊고 예뻐. 우리 집에 사진이 와 있는데 와서 보라는 어머니의 분부를 전달하러 온 거야…』
『그래 그 얘기 했니?』
『C 선생의 심정도 모르고 하마트면 그 얘기 할 번 했지 뭐니. 가만히 보니, C선생의 애교가 백퍼센트야. 야아, 이거 보통이 아니구나! 어설피 C선생 앞에서는 얘기 못하겠구나 생각했지 뭐니!』
『그거 재미 있구나…』
『학교서는 묵은 짠지 같은 얼굴을 하던 C 선생이 어쩌면 그렇게 애교가 있니. 「핑크색 헨카치」를 입에 대고 읏흣 읏흣… 웃지 않겠니? 그런 웃음은 학교서 구경도 못 했다. 난 속으로 「라이발」이 생겨, 미끌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C 선생이 좀 가엾기도 하더라!』
『그래 사진 얘기는 안 했니?』
『어머니가 잠깐 오시란다고만 전하구, 충무로 앞에서 와 버렸어! 그리고 너를 찾으려고 뛰어가보니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던구나!』
『얘 강숙아 너의 오빠 C 선생하고 결혼하라고 그래라!』
『넌 C 선생 싫어하지!』
『싫으니까 시집 보내자는 거야. 시집 못 가면 「히스테리」가 된다. 우리한테 「히스테리」가 오니깐 그렇지』
강숙과 나는 깔깔 웃었다. 이튿날 나는 예비로 아버지한테서 결석 이유서에 도장을 받아가지고 학교로 갔다. 양심에 별로 꺼린 점이 없었으므로 나는 태연했다. 첫 시간이 끝나자 호출이 왔다.
훈육실에 들어가니 담임과 C 선생이 나란히 앉았다. 조금 후에는 「카운셀라」 T 선생이 산뜻한 양장으로 나타났다.
나는 미리 결석 이유서부터 담임선생에게 보였다. 아버지의 글씨에다 큼직한 둥근 도장이 찍힌지라 결석의 이유만은 의심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C 선생은 결석 이유서를 한참 보더니,
『아버지가 틀림없이 쓰신거니?』하고 따진다.
강숙이 말한 『읏흣』 웃던 표정은 손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전 거짓말 안 해요.』
나는 C 선생의 의심하는 물음이 미워서 이렇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