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14) 「원」을 지낸 정문호·16歲(세)에 會長(회장) 지낸 손선지
全州대성동서 셋이 被逮
獄中 變心해서 背敎할번
「천번만번을 되뇌어도 背敎는 않는다」고… 손씨
발행일1963-10-20 [제395호, 3면]
■ 「원」을 지낸 정문호
충청도 임천에서 나서 전라도 여러 지방으로 옮겨 살다가 포졸에 잡힐 때는 전주의 대성동 실리골에서 살고 있었다. 전주 감영에서는 포졸들을 두패로 갈라 한패는 성지동으로 보내고 또 한 패는 대성동으로 보낸 것으로 보이며 이 때 대성동에서 잡힌 천주의 종은 정 발도로메오와 베드루.손원선지 베드루.한서 셋이었다.
이들은 구진피리에서 성지동에서 잡혀온 한 베드루 일행과 하루밤을 묵었으니 곧 삼거리를 구진피라고도 한 듯하다.
정 발도로메오는 이때 잡힌 교우들 중에서 가장 연장이었으며, 한 때는 고을의 원님까지 지내기도 하였다. 품행이 방정하여 외인에게는 예도 바르고 모든 예절을 잘 가르치기로 칭찬이 자자했고, 교우에게는 교회에서 명하는 것을 잘 가르치기로 이름 높았다. 박해가 다가올 것을 짐작하고 외인이지만 교우에게 막대한 도움을 준 오사현을 시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려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 전에 포졸들에게 잡혔던 것이다.
대성동에서 잡힌 이들은 모두 전주 감옥 후면에 갇히어 다시 성지동 순교자들과는 격리되었으나 옥중에서도 착실하게 조·만과의 신공을 드려 치명의 예비를 단단히 하였고, 옥중에서 한 때 배교할 것처럼 보이게 되자 베드루.조화서의 격려를 받고 순교하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고도 한다.
『오늘 우리는 하늘에 과거보러 간다. 오늘은 참 축복의 날이다』하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기쁨을 가누지 못한 천주의 종이었고 전주 서문 밖 숩정리에서 한 베드루에 이어 두 번째로 한 칼에 순교하니 때에 65, 6세. 12월5일에 잡히어 13일 장날 장군들 보는 가운데 순교한 이 천주의 종의 시체는 오사현에 의해 용마루재에 묻히었다가 이듬해 1867년 3월6일(양력) 그의 아들에 의해 베드루.정원지 베드루.손선지의 시체와 함께 전주 근처의 막고개로 옮겨졌다 한다.
■ 16歲(세)에 會長(회장) 지낸 손선지
충청도 임천 지방에 있는 괴인돌에서 살다가 뒤에 전주의 대성동 신리골에 옮겨 거기서 12월5일 포졸들에게 잡히었다. 온순하며 착실한 이 천주의 종은 어려서 성교를 알자 곧 영세를 했으며, 기해년(1839년) 박해 때 순교한 정신부에게서 16세의 어린나이로 회장직을 받았고, 그 후 치명하는 날까지 착실하게 회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던 것이다.
구진피리 성지동에서 잡혀서 온 조 베드루 일행과 함께 하룻밤을 지낸 뒤 전주 감영에 끌려갔으나, 회장이었다는 것이 알려져 가장 혹심한 형벌을 받았다. 문초 때 관장 곁에 있던 오사문(친구인듯)이 『네가 한 마디만 하면 많은 돈을 쓰지 않아도 석방될 것이니 종교를 배반하겠다고 한 마디만 하여라』 하였지만 『만번만번 말하더라도 못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관장 앞에서 문초 받기는 두 번이었으나 포졸들에 의한 사사로운 형벌은 더 심해서 『너는 서학파의 두목이라 한다. 네 집을 거쳐 간 서양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서양 교회 서적은 어디에 두었는가』함에 『서양 사람이 내 집에 왔었다. 그러나 서울로 갔는데 서울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고 책은 가진 게 없다』고 하자 팔을 뒤로 틀어 뿌러지자 그 뒤로는 음식조차 다른 사람이 먹여 주어야 했었다.
형장으로 끌려 갈 때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어 감옥에 남은 교우에게 주었고, 술에 취해 헛갈긴 칼이 어깨를 치자 휘광이를 돌아다 보고 꾸짖어 셋재번 칼에 치명하였다.
칼을 받기 전 하늘을 쳐다보며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를 부르던 이 천주의 종의 시체도 형장 근처의 용마루재에 묻힌 것은 치명한 사흘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