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걸을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지? 걸음은 뛰는 것도 아니며 빨리 재촉하는 것도 아니고 무게있게 진출하는 것이며 질질 끄는게 아니고 허리를 펴고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고상한 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이 기술은 규율과 자유, 힘과 우아, 관용과 강직, 열정과 제어를 겸한다.
남녀간에는 이 태도 안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여자의 걸음은 가볍고 남자의 걸음은 용감하다.
걸음걸이는 내적 평화나 고민을 드러내지도 한다.
신심깊은 사람의 걸음걸이는 퍽으나 아름다운 것이다. 걸음은 참으로 종교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영원하신 그분의 바라보심 밑에서 경건하게 걸어가는 신자의 태도는 얼마나 힘있는 수법인가!
경건한 분위기 속에 거행되는 성체거동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는 누구나 다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걸음은 또 사람의 고상한 지위를 표시하기도 한다. 고개를 들고 몸을 단정히 가지며 몸짓을 제재하고 늠름하게 걸어 나아가는 태도는 바로 인간의 특전이 아니겠는가?
그실 몸을 꼿꼿이 하고 걷는 동물은 인간 밖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만은 아니고 성경 말씀대로 「천주님의 겨레」들이다.
천주님 안에서 우리는 새 생명을 받았고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성제를 통해 우리 안에 각별한 양식으로 살고 계신다. 그의 육체는 우리 육체 안에 계시고 그의 피는 우리 혈관 속에 돌고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안에 사느니라.』 그리스도게서는 우리가 당신과 같아질 때까지 우리 안에 성장하시며 또 우리는 그 안에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모든 사정(즐거움이나 슬픔, 일이나 휴식, 하다 못해 먹고 자는 것까지라도) 그리스도의 생활이 되게 마련이다.
이런 신비를 힘있고도 아름답게 상징하는 것은 다름아닌 걸음인 것이다. 걸음은 어떻게 보면 『천주님 앞에 거닐며 완전한 자되라』고 하시는 권유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걸음은 진실성과 진리를 담뿍 실은 사람의 걸음이어야만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하고 성실한 신자로서 걸음걸이를 천주께 바침으로 만민에게 수범할 수 있는 것이지 감정이나 애정으로 걸음걸이를 신비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대학장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