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史(한국천주교사)」의 硏究(연구)
「아카데믹」한 硏究機關 設置를 바라며
自己 位置 確立 위해
발행일1963-10-20 [제395호, 4면]
한국의 천주교의 역사는 극동에 있어서-한·중·일 3국 사이에서- 비록 필자가 사학도(史學徒)는 아니지만 가장 찬란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더구나 근자 교세의 확대의 속도에선 3국간에 수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믿는데 필자의 생각으론 「한국천주교사」의 「연구기관」이 있음직하나 여기에 착안한 인사도 있으려니하나 그래도 때로 염려가 된다. 「아카데믹」한 기관으로서의 자료의 수집과, 연구 업적을 내도록 추진한다면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 미칠바 효과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닐듯하다.
필자는 일찌기 지기(知己)들에게 「한국천주교사」의 본격적 연구란 희망적인 사업이며 여기서 학위론문의 자료는 적어도 수10편에 해당할 것이 나오리라고 역설한 적도 있다. 외우(畏友) 유흥렬 교수으이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의 역작이 유일한 것이라고 보며 그 외 몇 분의 논문도 있는 듯하나(?)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다. 오늘날 같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상승하는 교세에도 불구하고 제나라 「천주교사」 하나 완전한 것을 손질해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창피한 노릇임에 틀림 없다.
자료면에서 보면 현재 국내자료도 정리되어 있지 않다고 본다. 눈 앞에 놓인 이조실록(李朝實錄)에서 자료를 추려 정리한다는 사업도 본격적으로 착수만 하면 상당한 것이 되리라고 믿으며 규장각(奎章閣) 도서에서 또는 근자 출판되고 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도 어마어마한(?) 자료가 쏟아져 나올 것이 아니랴, 역대의 논음(論音)=천주교 탄압에 있어서의 국민에게 주는 교서)의 책자도 다 수집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야사(野史)나 그외의 민간자료의 수집도 산일(散逸)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한문 또는 초서한문독해(草書漢文讀解)의 실력자가 나와야 한다. 국외의 자료로도 「바티깐」·불국·일본… 그외 각국 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림」으로 수집한다면 적지 않은 것이 모일상 싶다.
그러나 이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자료의 정리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며, 더구나 이러한 자료를 가지고 「사」(史)를 엮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는 정치분쟁인 당론(黨論)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터로, 근대사의 복잡한 양상을 나타낼 것이며, 1면에선 사상사적 성격도 드러낼 것이 아니랴. 17세기 이후의 실학(實學) 사조와의 관계도 짙은 것을 예상한다. 좌우간 오늘날의 상태는 이러한 자료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하고 사장(死藏)하다시피 된 격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자료의 발굴과 정리는 천주교 뿐 아니라 학계로선 반드시 해결해야 할 거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와 연구는 개인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지만 어느 기관이 서서 원조가 있어야하기에 「연구기관」이 설립되기를 요망한다. 어느 정도의 재정적 뒷받침도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기관이 설립된다면 학자진의 포섭이 필요한데 반드시 교우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어서는 학계의 현황으론 인재를 모음에 불리할 것이다. 어느 교구에서 착안하고 처음은 불과 몇 사람의 성실한 착수로 시작하여 점차 확대해나갈 수 있고 해외에서 「바티깐」 「빠리」… 그외 도서관 등에 유능한 조사원이 파견된다면 희망적 사업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료집(資料集)으로 문헌의 간행이 「씨리즈」로 계속 출판되고 또 국부적 과제가 연구논문으로 되고 다시 종합적인 「천주교사」로서의 편성이 병행된다면 천주교 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적 역량이 또한 과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사학엔 문외한이라 외람한 제의를 한 것이지만 여지껏 한국의 천주교 관계의 연구가 과거에 일본 학자의 손으로 논문화되어 나온 것도 본만치 질과 양에서 결코 방심할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서구학자론 아직 한국의 자료를 다룰 수는 없을 것이나 우리로서는 국가나 민족의 체면에서도 「한국의 천주교사」의 연구를 촉진시키며 고수준의 업적을 생산할 수 있는 연구기관의 설치를 제의한다. 우리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과거에는 그래도 학문의 나라이며 문화의 민족인 터에 비록 현실에 많은 맹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쯤은 느끈히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 「분위기」의 촉진과 구체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끝으로 사학의 문외한인 필자가 분외(分外)의 제의를 한 것이니 독자의 양찰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