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 禮俗寬容(예속관용)의 程度(정도) (上)
孔子(공자)를 가르치라… 바오로 6세
발행일1964-05-10 [제422호, 1면]
아시아인으로서 처음으로 구라파를 구경하고 그리스도교회와 교섭을 가진 것은 아마 구라파를 침략한 몽고인들이었다.
당시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에 이노첸시오 4세 교종의 사절로서 「프란치스칸」 카르피네가 다녀간 것은 원 정종(元定宗)때 1245년이었다. 전교를 못하고 갔지만 2명의 「프란치스칸」이 중국에 온 것은 1254년이었고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머물게 된 것은 세조(世祖-그비라이칸) 때 1271년이었다.
역시 「프란치스칸」인 몬테콥리노가 「도미니칸」 1명과 함께 니콜로 4세 교종의 사절로서 원나라에 머물은 것은 1289년부터였고 그후 1336년에는 순제(順帝)의 사절이 베네딕트 12세 교종을 알현했다.
고유한 문화가 없고 구라파 문화를 견문한 몽고족 정권은 폴로에게 벼슬을 줄만큼 외래문화에 관대했으니 전교에도 지장이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조가 망한 후로는 교회도 없어지고 자존심이 굳은 한족(漢族) 정권인 명조(明朝)의 쇄국정책은 동서양의 문화적 접촉마저 끊어버렸다.
동양문화의 중심인 중국대륙을 눈앞에 두고 「상천도」에서 객사하신 사베리오 성인의 평생소원을 풀어 예수회원 릿치(리 마두)가 처음으로 상륙하여 머물던 남지나 「쟈오칭」(조慶)에서 「뻬낑」(北京)에 입성한 것은 1600년이었다. 그후 명조가 망하던 1644년까지 대략 반세기 동안에 이루어 놓은 리마두의 업적이 이제 새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외관상으로 이질적이며 거리가 먼 이단 문화 안에 적어도 유사적이며 가까운 본질을 발견하여 그리스도교를 INCARNATE하게 한데 그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아시아 문화에도 적응될 수 있는 원칙을 우리는 작년의 「가톨릭 청년」 2월호에 소개된 Generation of Giants의 서평에서 보았고 5월호에 THE GOLDEN STRING의 서평에서 10월호 ZENCATHOLICSM 서평에서 그 가능성을 알았다.
그러나 민족문화를 그리스도교 새오할에 적응시킴에 있어서는 「가톨릭 청년」의 금년 5월초에 실린 「머어튼」의 경고(警告)가 따라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기에 리 마두의 방법은 타협을 배척하면서 세심한 분간 선택이 있었음을 GENERATION OF GIANTS가 일러준다.
그리스도교 사회인 구라파의 「종교개혁」은 교회 밖에서 일어난 「개혁자」들의 야단이었으나 유교 사회인 중국의 「예절논쟁」은 집안난리였고 결국 해결은 되었으나 2백년이란 세월은 전교상 너무도 오래 낭비된 시간이었다. 구렁의 성총을 받았을 영혼을 놓친 수를 상상할 때 그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선교종 비오 12세께서 리 마두에 대한 반대를 뒤집어 그 「논쟁」이 완전히 해결된 1938년 12월 8일 이래 유교 사회인 우리 나라에서 유교 예절에 대한 분간이 어느정도로 달리규정되었는지, 참고문헌이 있었는지, 실태가 조사되었는지, 조사한 지역은 어느범위였는지, 또 사회의 계칭(階層)은 어떤 부분이었는지, 이 문제에 관련하여 일선 본당에서 체험한 서로 대립되는 보고가 수집되어 자료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문제의 해결이전에 예사로 알기 쉬웠던 불행의 잔재가 일소 되었는지가 관심사란 말이다.
작년 8월 11일차의 「가톨릭시보」에 보도된 중국주교단의 민간 예속(禮俗)에 관한 규정은 「예절 논쟁」의 실지해결이 보다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예속이 유교에 말미암는 한 우리 예속과도 공통될 것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궁금증이 일어난다.
『우리 풍속이 점점 서양화하니까 옛날 풍속과의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것은 점에 불과한 도시 생활만을 보고 전면인 향촌의 실정을 모르는데서 오는 무관심이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전통적 예절을 아직도 삼가히 지키고 지켜내려갈 부분이 있다. 어디서나 효도의 예절이 숭상되는 사회는 일반적으로 인간성이 근신하고 인정이 순후하다. 이것은 미사복사의 훈련이 『외부적(몸의) 행동에서 내부적(마음) 의식(意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된다.』라는 바오로 교종의 말씀이 자연적으로 예절에도 적용됨을 증명한다.
지난번에는 바오로 교종께서 중국의 「보인」대학장 우빈 대주교에게 『중국인들을 공자(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하라. 그런 다음에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교도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교 유교에는 상3계가 없는 대신 하7계의 시작인 효도가 강조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와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적 기초이며 효도를 선대에까지 소급시키는 제례(祭禮)는 「추사이망」의 연도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유교정례(正禮)대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인사들은 제사에 관한 「프로테스탄」의 괴상한 견해를 멸시하는 반면에 성교회의 단안을 충심으로 납득함을 볼 수 있다. 유교적 지성들과의 대화를 진전시키기로 우선 소개할 책이 있다. GENERATION OF GIANTS의에 「로꽝」(羅光) 주교의 A HISTORY OF VATICAN DIPLOMATIC RELATIONS WITH CHINA(敎廷與中國使節使)
그리고 1938년 12월 8일부의 교황문서는 물론 한국의 표준에서인 「사례편람」(四禮便覽). 주재용 신부님의 「先儒의 天主思想과 祭사 問題」는 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고 「중국예절」 문제에 관한 중국주교단의 교서는 긴급한 참고가 될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 견해보다도 다만 천주의 백성의 한 분자로서 관심사에 대한 문제를 제시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