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22) 딕슨 ③
발행일1963-10-20 [제395호, 4면]
『명동에는 뭣허러 갔었니?』
훈육주임은 가시같은 눈살로 쏘아보며 묻는다.
『아버지 심부름 갔어요.』
『무슨 심부름?』
『어느 사무소에 돈을 받으러 갔더랬어요.』
『그 사무소 이름이 뭐니?』
『동일공사야요.』
C선생은 오히려 실망한듯한 표정을 한다.
형사가 피의자를 잡아다놓고 문초하다 보니 진범인이 아닐 때 그런 표정을 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돈은 받았니?』
『네에.』
『얼마냐?』
『삼만환이야요.』
『수표로 받았니, 현금으로 받았니?』
『현금이야요.』
『………………』
훈육주임의 날카롭던 눈살은 조금 풀린다. 내가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닌듯 하다는 눈치다.
『같이 가던 미국 군인 남자는 누구냐?』
C선생의 잔주름이 오목조목한 눈시울은 다시 날카로워졌다. M씨를 만났을 때는, 저런 얼굴은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았을 테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미군은 누구냐 말이야?』
『아는 사람이야요』
『어떻게 아니?』
『…그냥 알아요.』
『지난 번에 음악감상실에서 알았다는 그 미군이냐?』
『네에.』
『미리 만나기로 약속을 언제 했니?』
『제가 언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그랬어요?』
덮어 씨우는 「올드미스」의 말이 미워서 반발을 했다.
『그럼 어떻게 만났어?』
「히스테리칼」하게 빽소리를 지른다. 아무리 무서운 표정을 짓기로 나는 훈육주임이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음악감상실이 있는 건물 앞을 지날 때 그가 뒤에서 불렀어요.』
『그래서?』
『얘기하며 충무로 길을 같이 걸었어요』
『왜 같이 갔니?』
『가는 길이 서로 같았어요.』
『그럴 때는 딴 길로 너는 가버리는 거야…』
(미군이 사람 잡아 먹나요. 괘니 도망가게!)
이 말이 목구멍까지 치미는 걸 참았다.
『그 미군하고 또 만날 약속 했니?』
『안 했어오』
내가 거짓말 한 것은 이 한마디 뿐이다.
『너는 그렇게 남자가 좋으니?』
「올드미스」가 표정을 늦추고 말한다.
『네에 좋아요』
『…어마, 얘좀봐?』
훈육주임의 늘어진 비개살이 긴장을 한다.
『선생님은 남자가 싫어서 「올드미스」로 계시지만 난 남자 좋아요』
『……』
훈육주임은 입을 딱벌리고 얼굴이 붉어진다.
『양나순 너무 말을 함부로 한다!』
귀를 후비고 있던 담임선생이 눈을 부릅뜬다. 일학년적 담임은 좋았지만 이학년에 올라와서 만난 이 담임은 별로 좋지 않다. 이 선생은 옷은 말쑥하게 입고, 넥타이도 번들한 색갈로 자주 갈아 매지만 속에는 상투와 도포와 짚신이 들은 것 같이 구식이다.
『선생님 앞에서 그런 말 버릇이 어디 있느냐, 우리 나라에는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여 일곱살이 되면 남녀가 서로 같이 앉으면 안 되기로 되어 있었다. 여학생 때는 얌전하게 품행 갖고, 공부나 할 일이지, 남자가 좋아 미군하고 다닌다니 퇴학당해도 좋으냐?』
『저는 우리 학교서 우리 담임인 선생님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남자기 때문에 그것도 퇴학감인가요?』
『…뭐, 뭐?…』
그는 매우 당황한다.
『…너는 말 대답을 함부로 하는데 못 써, 선생님들이 뭐라고 말씀하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두고 반성하는 기색을 보여야 하는 법이다…』
『속으로는 반성 않고 겉으로만 반성하는 척만 하면 되나요』
『속으로도 반성해야지 무슨 소리냐?』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반성해야 하나요?』
『어째 잘못이 없느냐, 학교를 결석하고 미군하고 시시덕거리며 다니는 것이 학생 신분에 잘 한 일이냐?』
『……』
이에 기세를 얻어, 훈육주임 「올드미스」도 역습을 해온다.
『정말이야. 얘는 어떻게 생긴 아이인지 선생님 말을 두려워 할 줄 몰라. 수째 선생님을 들이마실려고 들거든… 또 한 번 그 따위 수작하면 정학 처분이다. 아니 너』
『……』
1대1이면 나도 대답할 말이 많은데 2대1이라 잠시 침묵을 지켰다. 「카운셀라」 T선생까지 합치면 3대1이다. 나는 나무바닥을 바라보다가 담임의 뾰죽한 구두 위에 시선을 견준채 석고상같이 서 있었다. 아까 노는 시간에 교무실 아치 앞에서 「슈사인 보이」를 불러 닦던 구두인지라 거울면같이 반짝거린다. 속으로 침묻은 50환짜리 광채라고 생각한다.
T선생은 잠시 자기네끼리 숙덕거리더니 공박하던 두 사람은 나가고 침묵을 지키던 T선생만 남는다.
나는 조금 안심이 된다. 「카운셀라」는 언니나 어머니같은 입장에서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며 악을 쓰고 야단을 치지 않는 것이다.
『내 옆으로 와서 앉아…』
T선생은 부드럽게 뚱보가 앉았던 의자를 가리킨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그 의자에 와서 앉았다.
『나는 훈육주임 선생님과는 다르다. 너의 험을 찾아낼 생각은 없다. 나는 너를 이해하려고 할 뿐이니 모든 것을 나한테 얘기해라… 아버지는 네가 미군 청년과 두 번이나 만난걸 아시고 계시니?』
『………』
나는 얼핏 대답을 못했다. T선생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내가 께름해 하는 점을 찌른다.
『솔직히 대답해 봐!』
『아버지는 모르세요』
『아버지한테 얘기할 생각은 없니?』
『없어요』
『왜!』
『아버지는 그런거 이해 못 하는 사람이야요.』
『어째서 이해 못 한다고 단정하니?』
『성미가 괴상한 분이거든요.』
『어떻게 괴상하니?』
『아버지의 험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건 묻지 않겠다. … 그 미군을 너 좋아하니?』
『아직 그런 감정은 전연 없어요』
『아까 너는 남자가 좋다고 했는데, 그건 네가 반항적인 심리에서 한 말이지?』
『맞았에요!』
『나는 네 심리를 안다. 그 미군이 너와 교제하고 싶어 하든?』
『자꾸 주소를 가르쳐 달라하고 우리집까지 오겠다는걸 뿌리쳤어요』
『그 사람하고 다시 만날 약속은 안 했니?』
『… 안 했어요』
나는 다음 토요일 오후에 그와 만날 약속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나에게 미리 의논해라』
『네에, 선생님한테는 의논하겠어요. 전 C선생한테는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아요』
『너희들에게 이런 말할건 아니지만, 나도 C선생은 싫다. 나에게는 모든 것을 의논하기로 약속하자』
『네에…』
나는 T선생과 헤어져서 이미 몇 분 전에 공부가 시작된 교실로 급히 뛰어 갔다. 교실에 들어서니 두 종류의 시선이 나를 맞이했다.
하나는 어떻게 됐니, 무사했니? 하는 우정에 담긴 강숙의 시선, 또 하나는 춘자들의 적의에 찬 얄미운, 시선들이었다.
나는 T선생과의 이야기에서 마음도 가벼워졌지만 한층 명랑한 표정을 꾸미어 힐긋힐긋 바라보는 춘자들에게 시위를 했다.
강숙이가 괜찮았니 하는 신호로 주먹을 들어 엄지 손구락을 세워 보인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