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성청과의 정식 외교설립을 보게된 유래를 간단히 적어보려 한다.
본인이 아는 것으로는 1948년 12월에 최초로 우리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장면 박사가 「빠리」 유엔총회에서 역사적 성공을 이루고(1948년 12월 8일에 한국이 유엔에서 정식 승인) 「로마」에 와서 비오 12세를 예방하고 한국에 대한 사정을 상달하고 이대통령의 여러가지 뜻을 전달한 일이 있다. 그후 1950년에 국회의장 고 신익희 박사가 김동성 의원과 같이 역시 비오 12세를 예방하였고 이어 그당시 국무총리 백두진씨도 그분의 수행원이던 현 이한빈 대사와 「로마」를 방문한 일이 있고, 1951년 11월에 그당시 국무총리로 있던 장면 박사가 또다시 비오 12세를 예방하였다.
1952년에 그당시 서울대학원 원장 윤일선 교수의 비오 12세 개인 알현 및 1956년 3월에 그당시 국회부의장 조경구 박사도 비오 12세를 정식 예방하고 30분에 걸쳐 우리나라에 대한 사정을 호소하는 한편 「바티깐」과의 친선에 대한 여러가지 말씀을 드린바 있다. 그후 1957년 5월에 그당시 주미대사 양유찬씨가 이대통령의 특사로 공관 설치차 구라파 각국을 예방하던중 역시 비오 12세를 예방하고 이대통령의 친서를 제정한바 있다.
그 전후해서 이미 1950년 성년에 서울 노대주교님께서 원주교님과 같이 비오 12세께 알현을 했고 또 1956년 1월 제2차 구라파 방문시에 또다시 비오 12세를 알현한바 있다. 그후 모든 이가 다 아는바와 같이 58년도 59년 60년 이어 한국 여러주교들이 연달아 비오 12세 요안 23세의 알현을 가진 바 있는 사실에 있어서는 유달리 특기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다만 한가지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우리나라에 가톨릭신도수가 166,471(1953년)에서 약600,000(1963년)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아, 세계 어느나라보다 전교가 잘되는 나라로 알려진 사실과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 두번씩이나 참석하면서 한국주교님들이 음양으로 한국교회 실정을 성청에 좀더 잘 반영시킨 사실이 역시 오늘의 국교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여튼 이박사시대부터 「바티깐」과의 국교 설립에 대해서는 수차 논의한 바 있을 뿐더러 심지어 한번은 이박사가 노대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한 바 있다 한다. 『교회에서 경제적 책임을 지고 인선을 해주면 내가 그에게 모든 권리를 주며 대사로 임명할 용의가 있다.』라는 좀 부조리한(비상식적) 일화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부산 정치파동때부터 시작되던 다른 미묘한, 여기 노골적으로 기재할 수 없는, 정치적문제로 실제상으로는 「바티깐」과의 외교설립을 이박사가 꺼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정치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에서도 이미 제2차 대전 전부터 한국보다도 가톨릭 신도가 적은 나라이지만 대사를 파견하여 국교를 열고 있었다는 이유로 비교해서 「바티깐」과의 국교 설치를 강조하면 대단히 싫어했다 한다. 그러나 그때 적극적으로 「바티깐」과의 외교 설정을 추진시키지 아니한 커다란 이유중의 하나는 자유진영의 최대강국인 미국도 「바티깐」에 대사를 파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영국까지도 같은 실정에 놓여있다는 그 사실을 제일 큰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정권시대의 외교정치에 있어서의 큰 실수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미숙한 외교정치라고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니 영국이 「바티깐」에 사절을 파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 맹목적인 종교적인 대립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양국의 실정에서 오는 폐단이라 하겠으며 비록 공공연하게 대사를 파견못하는 미국도 대통령의 개인사절이 비공식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가 하면 현재 주이미국대사관 모이등 서기관이 이일을 전적으로 맡아 보고 있는 사실로 보아 실제상에 외교를 항상 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서는 미국이나 영국뿐 아니고 종교문제로 주저하고 있는 국가들이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통해서 서서히 난화되고 있는 종교적 대립은 고 요안 23세의 산 표양이나 현 바오로 6세의 역할을 통해서 일소될 것을 희망하고 기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번 역사적 국교 설립이 쉽게 사능하였던 것은 현 주한교황공사 델 주디체 대주교의 숨은 노력도 지대하지만 특히 잊을 수 없는 지대한 노력으로 오늘의 기쁨을 가져오게 한 제일 큰 공로자는 주이대사 이종찬 장군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이는 1961년도 7월에 주이대사로 임명되어 「로마」로 부임하던 때부터 이에대한 직접 간접의 숨은 노력을 하였을 뿐더러 1962년 정초에 서서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던 구라파 아프리카 근동에의 공관장이던(현 주서독대사) 최덕신 외무장관과 기타 동회에 참석한 대사 및 공사들께 이에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적극적인 여론을 일으켰던 것이다.
1962년 3월 25일에는 우리 조국에 역사적 교계제도 설정을 보게되었고 이에대한 직접적인 제일 공로자인 그당시 주한 교황사절 주삐 대주교님과 수차로 상봉하던 기회에 이에대한 여러가지 사정을 적극적으로 언급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또 1962년 6월 29일 「까소리아」(나포리옆)에서 위에 말한 델 쥬디체 주한교황사절께서 치꼬냐니 국무장관으로부터 대주교성성식을 받을 때 주이대사 이종찬 장군이 그 성성식에 참석하는 한편 비공식으로 국무장관 치꼬냐니 추기경에게 한국과 「바티깐」간의 국교설립에 대한 건의를 하고 서로 이 문제에 대한 대화를 가졌었던 것이다.
이어 동년 10월부터 12월까지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제1회기때에 한국 주교단은 물론이요 교황사절 델 쥬디체를 모시고 수차로 이에대한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63년 7월 초순에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구라파 · 아프리카, 근동의 공관장 회의때는 이에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정도에 끝나지 않고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촉진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당시 외무장관 김용식 장관과 모든 공관장들이 같이 바오로 6세 알현에 대한 알선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