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15) 베드루 한원서·베드루 정원지
父親의 背敎 권유 拒絶
老母에의 孝誠으로 苦憫
발행일1963-10-27 [제396호, 3면]
▲베드루(요셉?).한원서는 충청도에서 태어나서 병인년 순교할 때는 전주 근처의 대성동 신리골에서 살고 있었다. 착한 성질의 소유자인 그는 충청도의 진잠에 살 때 회장을 지냈응나 대성동에 옮겨지자 그곳에 손.베드루가 회장으로 있기 때문에 회장직은 그만 두었지만 교우나 외인에게서 모두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던 착실한 태중교우이었다.
충청도에서 살고있을 때부터 이미 치명하기를 원하였었다. 포졸이 그를 잡기 위해 마을에 왔을 때까지도 그것을 모르고 집에서 장작을 패다가 잡히었다.
정 발도로메오들과 함께 구진퍼리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전주에 묶여 갔으나 그가 잡히자 그의 아버지는 친구인 박별감을 통해 석방을 교섭하는 한편 옥중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하여 『네가 배교하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일은 잘되고 석방되리라. 그러니 그렇게 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지만 『그 말씀은 옳지 않읍니다.』하여 거절하였고 옥중에까지 찾아와서 배교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아니라도 여러 자녀를 거느리고 있읍니다. 그러니 제게 그렇게 권하지 마시고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거절하고 말았다.
12월13일 한 베두루 등과 함께 서문 밖 숩정리에서 참수되었으니 그때 나이 37·8세였었다. 그의 시체는 남녀 교우들에 의해 순교지 근처인 용마루재에 굳히었으나 이듬해 3월(양력) 초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에 의해 조 베드루의 시체가 이장된 근처에 옮겨지니 곧 전주 지방의 막고개가 바로 그 곳이다.
▲베드루.정원지는 충청도 진잠 출신으로 전주 지방의 양량수널마루에 살다가 금구 지방으로 이사했었고 잡히기 전에 전주 지방의 성지동에 옮겼다.
결혼한 그는 아내와 함께 형과 한 집에서 산 착실한 태중 교우였었지만 나이 어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판은 별로 남겨지지 못했다.
조 베두루가 잡히던 1886년 12월5일(陽) 정.베드루는 산으로 피신하였었고 조용해진 마을의 동태를 살피는 사이 산으로 그를 잡으려고 올라온 포졸과 마주쳐서 잡히게 되니 동리 뒤 발몬리나는 산마루였었다. 조.베드루 등 일행 7명과 함께 구진퍼리(삼거리)에서 하루밤을 묵고 전주 감영에 옮겨졌으나 그가 갇힌 곳은 감옥 전면이었다.
모든 이가 치명의 영광을 기뻐하였지만 정.베드루의 지극한 효성은 늙은 어머니를 생각한 끝에 여러번 눈물을 흘려 다른 교우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고 그 뒤 다시 전과 같이 기쁨에 넘쳐 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우리는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니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요』라고 가족에게 위안의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12월13일(陽) 서문밖 숩정리 장터에서 장을 보러온 장꾼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니 때의 나이 21·2세였었다.
그의 시체는 그날같이 치명한 교우들과 함께 오사현의 주선으로 순교지 근처의 용마루재에 임시로 묻히었다가 다음해 3월 초(양력)에 그의 형 정원집의 손에 의해 고산 지방의 다리실에 옮겨져 지금도 그곳에 묻히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