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23) 고적감 ①
발행일1963-10-27 [제396호, 4면]
노는 시간에 강숙이가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우리가 으슥한 강당 모퉁이로 가는 것을, 춘자들은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했니?』
강숙은 언니나 어머니같은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T선생에게, 남자가 좋다고 반발로 대답한 것까지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다. 강숙은 한 번도 웃지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말없는 그에게 한층 신뢰감이 간다.
『이런 얘기, 춘자들에게는 허지 말아다오』
나는 다짐을 했다.
『난 게들에게 네 얘기 안 해…』
강숙은 쓸데 없는 다짐을 한다는 듯이 세게 고개를 젔는다.
다음 노는 시간에도 춘자가 강숙이 앞으로 가서 무언지 속사긴다. 내 얘기를 묻는 눈치였다. 강숙이가 뭐라고 말댓구를 하고 있다. 나는 어쩐지 염려가 되었는데 방과 후 같이 가면서 강숙에게 물었더니.
『나순이가 선생님한테 불려간 까닭이 뭐냐고 꼬치꼬치 묻기에 아마 전국중고교 영어웅변대회가 있는데 그것 때문이라나 봐…』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허리를 잡고 웃었다.
강숙이는 웃지도 않고 태연했다.
이튿날 점심 시간에 도시락을 먹고 운동장에서 놀다가 교실에 들어보니 흑판에 누가 양키 병정하고 같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학생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리고 두 인물의 대화가 쓰여있다.
『미스양은 남자가 좋다지?』
『애스!』
물론 춘자들의 장난인 것이 뻔했다. 춘자, 명희, 그밖에 춘자 「그룹」들이 사오명 몰려 앉아서 곁눈으로 내 얼굴색을 살피고 있다.
『저 낙서, 어떤 년이 했냐?』
나는 소리치며 춘자를 비롯해서 그들의 「그룹」을 쏘아보았다. 누군지 알기만 하면 머리를 잡아 끌어줄 생각이었다.
춘자들은 일제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누구의 입에서 발설이 되었을까?』
처음에는 강숙이를 의심했다. 선생 이외에 아는 사람은 강숙이 뿐이다.
『어떤 년이냐?』
나는 핏대를 울리며 거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느낄만큼 내 입술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누가 저런 장난을 했을까, 저런 일이 있으면 「크라스」의 명예를 위해서 감추어두지 않구?』
춘자가 능청맞게 웃으며 이렇게 ㅁ라을 한다.
나는 낙서 그림을 지우려고 교단 위까지 올라갔다가 그냥 두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강숙이를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가 않아 혼자 교사 벽돌담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춘자의 능청맞게 웃던 얼굴을 흑판 짓기로 한대 갈겨줄걸 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 시간에 교실에 들어서니 낙서 자리는 선생이 들어오기 전에 급히 지운양 보오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이윽고 선생이 들어서고 공부는 시작되었는데 선생의 말은 내 귀에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공부시간이 필한 뒤에도 나는 자리에서 꼼짝 않고 우둘툴한 책상면에 시선을 준채 우울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오아시스와 같은 벗 강숙이에게도 배신 당한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책상 위에 얼굴을 묻고 젖은 눈을 감추었다.
강숙이를 의심하면서도 설마하는 믿는 마음도 있어서 강숙의 손길을 은근히 기다렸으나 내 옆에 와서 말을 건내주는 이 하나 없었다.
얼마쯤 후 고개를 들어보니 교실 안에는 너덧댓명의 아이들이 남아서 소설책인지 잡진지를 읽고있을뿐 강숙이는 안 보이고 춘자들의 자취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강숙이가 발설했을거야, 그러길래 내 옆에 오지도 않았지?)
강숙에 대한 의심은 더욱 짙어질 뿐이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나와 내 그림자 뿐이었다. 어쩐 일인지 강숙은 먼저 가고 보이지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강숙은 농구선수기 때문에 농구연습이 있어서 바삐 왔다 갔다 하느라고 나하고 얘기할 사이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강숙은 낙서한 사건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일이 발설이 된 것은 T선생의 입에서였다. 춘자는 T선생과 이웃간인 명희를 꼬두겨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그런 경우를 전혀 모르는 나는 꼭 강숙의 입에서 말이 나온 줄로만 알았고 믿었던 벗까지 잊어버린 슬픔이 가슴을 아프게 조였다.
집에 돌아온 나는 한층 우울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딕슨인가, 그 자식하고 연애나 해 버릴까?)
이런 자포자기한 생각도 든다.
(토요일 오후 딕슨과 만나기로 한 약속은 버릴 생각을 했더니 우정 만나러 갈까보다!)
차츰 슬픔에서 반발이 고개를 쳐든다. 마음은 슬펐으나 저녁상을 대하니 식욕은 전과 같이 왕성했다.
슬퍼도 음식만은 여전한 것이 웃읍기도 하고 내 자신의 슬픔과 고독에 대해서 미안한 생각도 든다.
배가 부르니 슬픈 기분이나 고적감도 훨씬 가벼워진다.
(교회에나 가볼까?)
문득 김진호 생각이 머리를 쳐든다.
갑자기 김진호가 몹시 그리워진다. 아버지의 반대로 맘속에서 한 때 멀어졌던 그 얼굴이 커다랗게 다시 내 마음 속에 「컴백」해온다.
나는 반사적으로 책상 앞을 떠나 방문을 급히 열고 마루로 나왔다. 마침 아버지가 들어선다.
『어딜 가니, 저녁에?』
『…………………』
『저녁에 못 나간다』
『친구네 집에 책 좀 빌리러 가요…』
『친구 누구?』
『강숙이라구. 요 너머 살아요!』
『십분 이내에 다녀오너라!』
『…………………』
나는 대답하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가는 길에 뒤를 돌아 보았으면 아버지가 따라오는걸 알았을텐데 나는 생각에 잠겨 걷고있었다.
(김진호를 못 만나면 어떡헐까? 오늘 저녁에는 교회에 아무 것도 없으면 어떡허나?)
내 마음은 목이 메이도록 김진호의 따뜻한 우정이 그리웠다.
교회에 가니, 마침 저녁미사가 있었다. 좁은 교회 안에는 입추의 여지 없이 교인들이 가득차 있었다.
진호가 늘 앉던 자리… 거기에는 딴 사람의 뒷 모양만 눈에 뜨이고 진호는 안 보인다.
미사는 이미 절반쯤 진행한 뒤라, 한 20분이 지나자 곧 끝났다. 신발장 앞에서 한꺼번에 몰려나오는 사람의 물결에 넋 없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겨우 신을 찾아 돌층계 앞에서 신을 신으려고 할 때 어깨를 치는 손길이 있다.
돌아보니 진호였다.
『어마!』
나는 너무 반가워 하마터면 진호의 어깨에 매달릴뻔 했다. 두 손이 거반 진호의 어깨 앞까지 갔다가 멈칫했다.
『교회에는 아주 안 나오는줄 알았더니 나왔군요.』
『오늘은 어쩐지 오고펐에요…』
구두를 신고있는 진호를 밖에서 기다릴 때 저편에서 날카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과 부딪쳤다.
『나순아! 이리와!』
시선 속에 품은 차디찬 가시와는 달리 말소리는 부드러웠다. 과히 야단은 안 칠라나? 이런 기대를 가지고, 아버지 옆에 가니.
『미친년! 여기가 강숙이네 집이냐?』하고, 나직히 쏘아부친다. 나는 뒤에 신발을 신고 따라나온 진호를 돌아볼 새도 없이 아버지에게 끌리어 교회문을 나왔다.
교회 앞을 떠나 한길 모퉁이로 돌아서자, 잠잠하던… 그리고, 태연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사납게 변했다.
『이년! 이젠 네 말은 한 마디도 신용 안 한다! 집에 가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