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NC】 10월27일(주일) 그리스도왕 축일을 기해 영국 개종에 헌신한 복자 한 분이 탄생했다.
바오로 6세 성하께서 집전한 동 시복식에는 새로 복자위에 오른 도미니크.바베리 신부의 동료 고난회원과 영국 및 미국의 순례단들이 참석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는 19세기의 위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죤.헨리.뉴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장래의 추기경인 뉴먼의 첫 번 고해를 들은 것은 정확히 1845년 10월9일이었다. 이로써 성공회 신학자를 「로마」 교회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도미니크.바베리는 1792년 6월22일 이태리 「비떼르보」에서 농가의 끝째로 탄생하여 3세에 부친과 사별했다. 어머니 안또니아 손에서 자라난 그들의 생활은 너무나 빈한했다.
그러나 그는 모친의 탁월한 신심을 배울 수 있었으며 특히 묵주신공을 배우고부터는 하루도 궐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고난회 신부가 되면서 「천주의 모친 도미니크」란 이름을 가졌다.
그의 청년 시절은 정열에 찬 것이었다. 그는 강제로 동원되었던 나포레온 군대를 탈출했고 사랑 끝에 약혼까지 했었다. 그러나 한 번 자기 형의 격려를 받자 즉시 약혼을 파약하고 고난회를 지원했다.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한 평수사로 있으면서 영국의 가톨릭 교구가 회복되지 전에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정상적 교육을 받지 못했으면서 독학의 노력으로 그의 총명을 열려갔다. 사제가 되고 철학을 가르치게 될만큼 그의 영국 생활은 지난한 것이었으며 그의 나이 47세가 되기까지 영국의 고난회 수도원을 세우기까지 그것은 참으로 고난의 길이었다. 그는 곧 수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때까지 20년간은 병고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병고는 신앙과 투지를 꺾지 못했다.
1840년에는 베르기에 고난회를 설립하는 임명을 받았다.
「옥스포트」 근방에 전교차 나갔다가 그가 죤.헨리.뉴먼을 방문한 것은 1844년 6월이었다. 그것은 흔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뉴먼은 다음해 도미니크 신부를 찾아 고해하고 가톨릭 교회로 들어왔었다. 그는 1849년에 서거했다. 1855년에 그의 유해를 「리버풀」대교구 「수튼」 고난회 수도원으로 이장했다. 그의 시복 이유는 서거 후 10년 이내에 각국 순례단이 당도했고 성 비오 10세는 1911년 6월14일 가경자(可敬者)의 칭호를 보냈다. 1944년 세계대전 중 비오 12세는 그의 시복청원을 내도록 영국 가톨릭 당국에 요청했었다. 『그는 영국을 위해 고심극기하고 영국을 위해 일하다가 마침내 영국을 위해 죽었다』고 영국 그리핀 추기경이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