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16) 조윤호·이윤일
父子가 함께 석달을 拷問
발행일1963-11-03 [제397호, 3면]
▲요셉.조윤호는 수원에서 출생한 아버지 베드루가 충청도 신창에 이사해서 살 때 신창에서 나서 전주 성지동에 이사한 것은 순교 3년 전인 1864년이었다. 그곳에서 결혼,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면서 충실하게 교우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아버지와 같은 날 잡히어 관장으로부터 『나라 법에 의해 부자를 한 칼에 죽일 수 없으니 이 다음 죽이겠다』 한 말대로 아버지가 참수된 다음 장날인 1866년 12월18일 전주 서문밖에 있는 장터 서천교 밑에서 목을 치는 곤장 16도에 치명하니 때에 나이 19세였고 이 자리에는 그의 어머니와 많은 장꾼들이 구경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의 시체는 닷세 앞선 아버지를 비롯한 순교자들이 묻힌 서문밖 서천교 위에 있는 용머리제에 묻혔다. 그의 아버지와 마짐가으로 헤어질 때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님, 아버님은 영원한 영복소로 떠나십니다. 거기에 가시더라도 저를 잊어주지 마십시요.』라고 하자 그의 아버지 베드루도 『물론 나는 죽음에로 간다. 그러나 너도 마음을 놓지 말고 곧 나를 따르라』하여 마지막 이별을 고무와 영광으로 헤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배교하라는 거듭되는 권고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내가 살고 죽는 것은 너의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말은 아예 그만 두어라』하여 형장에 끌려가는 오리길 도중에서도 흑심한 구박을 받았으며 형을 집행하는 직전의 배교요구에서도 『당신은 어떤 이의 부모가 죄를 범하여 그 아들이 대신 잡혔을 때 재판관이 「네 부모가 아니라고 말해라」한들 그 아들이 「내 부모가 아니노라」 하겠읍니까. 하물며 나는 좋은 가르침(천주)을 알았고 그것을 따랐읍니다. 어떻게 해서 그 교를 거짓이라고 버릴 수 있겠읍니까. 그런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으니 나를 곧 죽여주십시요』하여 치명하였었다.
▲요안.이윤일은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경상도 문경군에 있는 여호목골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잡히니 병인년 박해가 지방으로 번져간 음력 10월 초의 일이었다. 태중교우였고 회장이던 그는 큰 키와 길고도 많은 수염을 가진 위엄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효자이기도 하였다.
이웃마을 사람을 앞세우고 오는 포졸들을 바라다보면서 피하지 않은 그는 이미 순교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으며 『같은 마을 교우 외는 모르노라』하여 매맞고 30여 명과 함께 문경으로 끌려갔었다. 판관이 없는 문경에서 사흘동안 고문당하였고 가산도 포졸들이 원하는대로 가져가라 하였다. 상주에 옮겨져서 초하루와 보름과 그믐날 달에 세 번씩 석달동안 혹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이 곳에서 배교한 이는 풀려 나가고 부녀자나 어린이는 여기서 처형되었고 사학의 으뜸이라하여 이요안과 회장 김씨 형제 세 사람만 대구로 압송되었다.
문경에서는 배교만이 아니라 돈을 내라는 포졸들의 등살에 모진 주리를 곤장을 맞고, 이중으로 된 큰 칼과 발목을 묶기었지만 간단 없는 신공과 잡혀온 교우들에 대한 격려를 잊지 않는 천주의 종이었다.
언제나 웃는 낯과 기쁨에 찬 얼굴은 교우들에게 큰 위로와 표양이 되기도 하였다. 대구 남문 밖 관덕당에 옮겨진지 사흘 뒤에 좋은 음식을 대접받고 참수되니 1867년 1월21일(양력)의 일이었고 그 때 45·6세였었다. 참수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울고만 있던 회장 김씨 형제와는 좋은 대조가 되어 길이 찬양의 말을 듣고 있거니와 휘광이에게 돈주머니를 주면서 『이것을 내가 가지고 죽을 것인가, 이 돈을 받고 내 목을 단번에 베어다오』하는 여유 있는 이 치명자의 무덤은 그날밤 교우들에 의해 형장 근처에 임시로 묻었다가 3년 뒤 날미뒷산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