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께서 세상에 계실때 「파레스타인」에는 주로 유태 사람과 희랍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대로마제국의 한개 영토였읍니다.
희랍 사람들은 통치자에게 순종하였으나 「바리서이」들은 로마사람을 증오하는 나머지 모든 유태사람을 반정부운동전선에 몰아내려고 애써왔읍니다.
유태사람 가운데 정부에 순종하는 사람은 헤로데당이라 불렸는데 그까닭은 토착 헤로데 왕가에서 대대로 로마의 세살에게 충성을 바치고 분봉(分封) 왕으로서 통치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유태 사람들과 희랍사람들은 각기 자기네들까리 사용하는 돈을 가지고 있었으나 로마정부에 바치는 세금은 로마돈으로 해야만 했읍니다. 유태의 율법학자들 사이에 일러내려온 격언이 있었으니 『왕의 돈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백성은 그 왕을 저들의 임금으로서 섬기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리서이」들은 로마제국의 돈이 「파레스티나」에서 유통되는 것을 분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지주일날 오주에게 베풀어진 백성들의 개선장군 맞이하듯 하는 굉장한 환영에 「바리서이」들은 약이 바짝 올랐읍니다.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이에 「바리서이」들이 가서 공론하여 하여금 예수를 말로건과 잡고저 할새』 저의 제자들을 헤로데의 당과 한가지로 예수께 보내여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늙은 「바리서이」원흉들은 뒷전에서 망만 보고 있었는데 만일 그들이 함께 예수앞에 나타나면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철저히 교육을 시켜놓은 제자들만 골라서 대표로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헤로데의당 즉 정부의 충성한 유태인들도 그 댚일행에 끼어 가도록 유이하는 공작을 잊지 않았읍니다. 가면을 슨 「바리서이」 졸개들은 별별 시늉을 다하며 존대의 말을 써서 일을 시작했읍니다.
『스승이여』 이렇게 그들은 탐스러운 칭호로 위선 불렀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스승은 진실되시며 또 천주의 길을 진실히 가르치심이 아무에게도 사정을 두지 아니시니 대개 사람의 지위를 돌아보지 아니심이니라』 가면적인 이 찬사로써 예수를 위선 묶으려는 그들의 간교함을 보십시요.
이 젊은 「바리서이」들은 정녕 그 간교함에 있어 마음속으로는 예수를 극단으로 미워하고 있었읍니다. 옛날의 한 작가는 그들을 꿀벌에다 비긴 적이 있었읍니다. 입에는 꿀이 가득하지마는 꼬리에는 무섭게 쏘는 독바늘이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그 독 바늘이란 다음과 같은 음흉한 정치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즉 당신의 의향이 어떠하신지 우리에게 말하소서. 세살에게 세납을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혹은 가치 아니 하나이까』 이 얼마나 간교한 질문입니까? 예수를 빠져 나올 수 없는 진퇴유곡으로 몰아넣었다고 그들은 생각했읍늬다.
만일 예수께서 『세납을 바치는 것이 가하다』고 하면 그를 친로마파로 몰아서 비난을 퍼붓고 백성들에 대한 예수의 인기를 망칠 계획이었읍니다. 또 만일 『아니다 세납을 바치는 것이 가하지 못하다』고 하면 이자리에 있는 헤로데의당 즉 친로마분자들이 그를 비라도 총독에게 고이 바쳐서 반역의 무서운 죄명을 쓰고 처단될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예스」건 「노」건 즉 대답이 가이건 부이건 예수를 망가 뜨리는 것은 매한가지었읍니다. 「바리서이」들이나 헤로데당들이나 다 예수의 대답에 비상한 근심을 가지고 그의 주위에 바짝 다가들어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를 완전히 사로 잡았다고 생각했읍니다. 어리석은 자들! 예수께서 그 값비싼 보혈을 정치문제로 흘리실줄 생각하였는가?
그러나 예수 저들의 간교함을 알으시고 가라사대 『겉꾸미는 자들아 어찌하야 나를 시험하느뇨? 구실 바치는 돈을 네게 보이라』하셨읍니다. 「바리서이」들은 예수가 자기 입으로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을 것을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고 있다가 이와같은 정면으로 꾸지람과 함께 돈을 보이라는 갑작스런 요구에 어쩔줄을 몰랐읍니다.
왜 또 갑작스리 로마의 돈을 보기를 원하는 것일가? 그전에 자주 그 돈을 봤을 것이 아닌가? 괴이하게 여기면서 그들은 예수의 얼굴을 쳐다 봤읍니다. 그러나 거룩한 얼굴은 다만 안온한 위엄으로 찼을 뿐이었읍니다. 화성(畵聖) 티티안은 거룩한 용안의 동정과 그 당시의 광경을 한폭의 그림으로 묘사한 작품을 남기고 있읍니다.
어찌하였던 기선(機先)을 제압당하고 얼굴들이 빨갛게 되어 가지고 그들은 로마의 은전 한잎을 꺼냈읍니다.
주께서는 그 돈 위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과 글자를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모상과 및 기록은 뉘 것이요』 그들은 으리되 『세살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 저들에게 가라사대 『그러면 세살의 것은 세살에게 바치고 천주의 것은 천주께로 바치라』 이 얼마나 중대한 대답입니까? 얼마나 명쾌한 원칙입니까?
우리 구세주께서는 문제의 핵심을 정당정치의 영역에서 맴돌게 하지 않고 인간의 천주와 국가에 대한 보다 고차원적인 문제로 비상시켰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두개의 각각 다른 영역으로서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며 그러나 상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세주께서 정해주신 이 존엄한 원칙은 인간의 천주와 국가에 대한 관계를 조화있게 규정하고 있으며 양자의 권한을 다 보장하는 것입니다. 말꼬리를 잡으려던 자들은 국가에 세납을 바치는 것이 부당한 것이라는 전제위에, 그런 질문을 하였던 것인데 주께서는 구실을 바치라 즉 정당한 의무로서 납세를 명하심으로써 확고한 대답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께 속한 것을 천주께 바치는 것도 못지 않게 정당한 것입니다.
국가의 권위 위에 천주의 권위가 있는 것인데 이 권위에 대하여 인간은 존경과 순종과 사랑을 바칠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와 국가는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협력하며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 복지를 위하여 국가의 권력이 반드시 우월하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국가는 종교의 권익을 존중하고 교회가 국민의 정신적 및 현세적 복지를 증진하는 것을 도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계명을 거역하여 세납을 바칠 것을 거부하고 정부에 반항하며 일어섰다가 그 결과 40년 사이에 로마 사람들은 수백만이 유태사람들을 죽이고, 또 노예로 삼았읍니다. 그리고 또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태사람들은 그들의 독립된 민족구가를 가져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은전은 로마에서 주조되었으며 로마에 속한 것이니 결국 세살의 금고로 돌아갈 숙명인 것입니다.
『이 모상과 및 기록한 것은 뉘것이뇨』
우리의 영혼은 천주가 당신 모상을 따서 비슷히 만들었읍니다.
사람의 영혼은 천주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천주의 금고로 돌아갈 숙명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공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와 교인으로서 천주께 대한 의무를 충실히 그리고 천주의 계명을 따라 즐거운 속에서 다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세살의 것을 세살에게 바치고 천주의 것은 천주께 바치라.
安 아르도 神父(춘천 죽림동주교좌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