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성지순례)] (34) 나자렡, 나임邑(읍), 타볼山(산)
바랑을 걸머메고 그 길들 걷고싶어
발행일1963-11-03 [제397호, 3면]
「나자렡」에 돌아오니 어느 사이에 비가 왔는지 땅이 촉촉히 젖어있다. 오늘 처음 느낀 것은 아니지만 만일 내게 자유와 시간과 돈의 여유만 있다면 2·3년을 기한하고 바랑을 걸머메고 예수님 다니시던 곳을 예수님처럼 보행으로 순례하며 천천히 묵상해보곺은 충동을 받았다.
하야시(林子平)란 사람은 주견을 펴 볼 길 없는 자기 신세를 탄하여 이르기를 『어버이 없고 자식 없고 아내 없고 판목(板木)집 하나 없다. 돈도 없지만 죽을 맘도 없다』 했지만 나 역시 자유도 없고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자유가 없다함은 우리나라의 해외여권 수속이 왜 그리 까다로운지 모르겠다. 구라파인들은 국경선을 넘기를 이웃집 사립짝 넘듯 넘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까다로운지 나같이 우직하고 요령없는 놈이라면 남이 대신해주지 않는 이상 여권 하나 내는데 서울을 수십번 오르내리고 수십개월 걸려도 내지 못할 판이니 자유가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해외여행이 이다지도 까다로울까? 언필칭 외화절약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눈감고 아옹하는 소리다. 해외에 나가면 외화를 소비만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벌어올 수 있다는 것은 왜 모르느냐? 또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워서 오는데서 얻는 소득은 왜 계산에 넣지 아느냐? 또 왜 처음에는 그다지 까다롭게 굴다가 결국은 다 내주느냐? 결국 이것은 행정면의 후진의 입증일 뿐이다.
시간도 없다. 나같이 나 많고 재주 없는 자에게 무엇을 배우고 연구해 오라실 분도 없을 것이다.
돈도 없다. 이곳에 다시 왔다갈 여비는 어떻게 마련될지 모르나 2·3년 먹고 입고할 재력은 없다. 걸식을 생각해보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하고는 일종의 죄악이다. 쌀 한 톨 물 한 모금 얻어마셨다 해도 주는 그 사람에게는 그만큼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절대로 구걸하시진 않으셨다. 저 유명한 비안네 성인께서도 소시(小詩) 무전여행을 떠나셨다가 마치신 후 다음부터는 남에게 애긍은 하실망정 애긍받지는 않으실 맹세를 하셨다는 것이다.
거지 심정. 이것은 누구에게서나 철저히 배격되어야 할 일이다.
「타볼」산에 가는 도중 「나임」읍 앞을 지났다. 동리라야 산 밑에 붙은 조그마한 마을이다. 이 길가에서 예수께서는 한 과부의 외아들을 부활시킨 것이다. (루가 7장2절부터 6절) 산은 바위로 되어있고 앞들은 너르다. 보리밭이 금금(錦錦)해 있는데 그 가운대로 뚫고간 조그마한 시내는 말라붙었다. 「타볼」산록에 이르러 뻐스를 버리고 합승에 올랐다. 마침 안개가 끼어 시야를 넓힐 수 없음이 유감이다. 거의 바위로 되다시피한 산인데 이름 모를 풀과 관목이 점점이 자라있다. 관광을 위해 도로의 포장은 잘 되어 있다. 분도회 본부가 있는 이태리의 「몬떼·까시노」에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
산정에 이르르니 수도원이 있고 상당히 큰 성당이 있다. 이 성당도 무너진 것을 재건한 흔적이 역연하다. 성당 주위에는 옛날에 성을 쌓았던 큼직큼직한 바위가 쌓여 있어 그 옛날 회회교인과의 혈투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은 완전히 가톨릭의 소유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