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51) 연극 ④
발행일1964-05-24 [제424호, 4면]
다음차는 엳럽시 사십분에 있었는데 그무렵에 나는 다시 얼굴에 괴로운 표정을 나타냈다. 세 사람은 나를 이곳에 재워야 한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차시간이 지나자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갔고 병자 노릇도 답답해서 마루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이제 괜찮아?』
딕슨이 옆에 와서 앉으며 미소를 담고 얼굴을 들여본다.
나도 웃으며 턱을 끄덕였다.
막차가 있었으나 집이 멀어 통금시간 안에 돌아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딕슨은 열시까지 내 옆에 앉았다가 부대로 돌아가고 나의 잠자리는 건너방 온돌바닥에 군대용 모포와 「시이트」로 마련되었다.
(이밤 하루는 무사히 넘기게 되었는데 내일은 어떡허지?)
까칠한 모포의 감촉 속에서 나는 그 생각을 오래하지는 않았다. 내일은 나에게 먼 것이었다. 당장의 급함을 모면한 걸로 우선 만족하고 잠을 청했다.
이튿날 아침은 미리 눈을 뜨고도 일부러 자는 척하고 있었다. 식사때 부인이 건너방을 들여다 보고는 도로 나타났다. 부라운 상사가 나간 뒤에야 잠이 깬듯이 일어났다.
『좀 어때?』
부인이 묻는다.
『괜찮아요…』
아직도 몸이 깨끗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수를 하고 부인이 나라다 준 아침식사를 할 때 나는 「버터」를 담뿍 찍었다. 「버터」는 맨입으로도 먹을 만큼 좋아했다. 그러다가 문득 배탈 환자였던 것을 생각했다. 그때는 벌써 「버터」가 담뿍 발린 빵쪽이 입안에 들어간 뒤였다.
『집에서 뛰쳐 나왔어?』
부인이 앞 의자에 앉으며 묻는다.
『………』
대답하지 안호 조심조심 빵을 씹었다. 부인의 귀에 어떤 예비지식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딕슨이 뭐래요?』
나는 부인이 어느정도의 일을 알고 있나 싶어 되려 물었다.
『학생이 희망한다면 보내지 말아 달라군!』
『상사께서는 뭐래요?』
『상사는 승낙하셨어!』
『그럼 나 며칠 여기 있겠어요!』
『왜 집에 안들어가려고 하지? 아버지가 계시다면서』
『아버지하고 맞지 않아서 들어가기가 싫어요!』
『그래서야 쓰나?…』
나는 더이상 대답하지 않고 식사가 끝나자 책상에서 얇은 뚜껑의 소설책을 한권 꺼내서 폈다.
『그 책 볼 수 있어?』
부인은 내가 다음 「페지」를 넘길 적에 놀란듯이 묻는다.
고개만 끄덕하고 그대로 읽었다. 활자는 언제나 지남철과 같이 나에게 끄는 힘이 있었다. 한번 눈이 닿으면 그 활자의 줄을 쫓기에 열중하고만다. 간간이 모르는 단어들이 부딪쳤으나 앞뒷 말로서 대강 짐작을 하고는 넘어 갔다.
저녁에 딕슨이 찾아올때까지 책 한권을 조금 남기고 거의 다 읽었다.
부인은 그 얘기를 자기 남편에게 하고 있었다. 부라운 상사는 신통한 듯이 나를 바라보며
『너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니?』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나는 대답했다.
『책 읽는 동안에 도망간 것 같에요?』
부라운 상사는 군살이 붙은 어깨를 들먹거리며 퉁소의 고음 같은 소리로 웃었다.
사흘동안을 나는 낮에는 독서, 밤에는 딕슨을 만나며 비교적 즐거운 날을 보냈다.
나흘째 되던날 부인은 좀 미간을 찌푸리며 내앞에 왔다.
『우리집에 있는건 괜찮은데 학생집에서 사방으로 찾을거 아니야. 우리가 학생을 붙들어 두었다고 나중에 오해라도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부라운 상사가 걱정을 하니 집에 편지라도 해서 있는 곳을 알리는 것이 어때?』한다.
『알리고 싶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야?』
『…아뭏든 집에는 안들어갈 테야요. 이곳에 못있게 되면 딴데 가버릴테야요…』
『딴데 어디?』
『자살이라도 해버릴가봐…』
나는 시선을 허공에 준채 심각한 표정을 했다. 사실은 조금도 심각하지가 않았다. 자살 할 생각은 없었고, 문득 생각난 연극이었다.
『딕스을 좋아하면 장차 결혼이라도 하면 되는거지 아애 자살할 그런생각은 하지 않는거야!』
부인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자살하는거 뭐 어려워요 약국에 가서 수면제 몇십원어치 사서 훌쩍 먹어버리면 되는건데!』
『아니, 영어책도 그렇게 잘 볼 쭐 알면서 자살을 하나디? 얼굴도 예쁘면서…』
부인은 열심히 자살해서는 안된다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부인의 얼굴은 약간 격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몹시 겁이 많은 사람 같았다. 나는 부인의 얼굴이 재미었어서 우정 연극을 계속했다.
『죽는 것은 영원한 잠이거든요. 잠들은 얼굴에는 기로움도 없고 슬픔도 없을거야요! 죽는건 영원의 평화야요. 내가 어제 읽은 소설에도 죽음은 아름답다고 하였어요』
『사는게 아름답지, 죽는게 아름답다니? 그런 소설 익지 말어, 소설 읽고 죽을려는군!』
부인은 내 손에 든 소설책을 뺐는다.
『이건 그 책 아니야요!』
『그래도 이젠 소설책 읽지 말어!』
부인은 나에게 책을 못보게 했다.
책도 진력이 나던때라 오래간만에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오정 무렵의 햇살은 상공에 떠 있고 저편 공장지대의 높다란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서서이 푸른 하늘을 흐리며 흩어지고 있었다. 이쪽 부대로 가는 언덕길 고개에서는 두 미군 사병이 빈정거리며 오고 있었다.
그중의 키 큰 사병 하나가
『해이! 해이!』
하고 나를 향해 소리친다. 나는 그쪽으로 걷고 있었으므로 곧 우리는 서로 마주쳤다.
『우리하고 같이 놀지 않을테냐?』
키큰 사병이 아는사이나 되듯이 손쉽게 말을 건다.
『무얼하고 놀잔말이지?』
나는 심심한 김에 댓구를 했다.
『서울에 가는 길인데 너도 가자!』
『나는 서울은 하지 좋아않아』
『그럼 어디가 좋으냐? 네가 원하는데에 가자!』
『나는 이 고개길을 가는 것이 좋다』
『어딜 지금 가는 길이냐?』
상당히 뻔뻔스런 사나이었다. 키작은 사병은 그림자같이 가만히 서있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네가 알 필요는 없지 않느냐?』
『부대로 가는 길이냐?』
『그렇다.』
『무엇허러 가느냐? 남자친구가 필요해서 가는 길이냐?』
나는 사병을 노려보다가 문득 연극심이 생겨
『그러다.』
하고 대답했다.
『그럼 내가 친구가 되어 주마!』
하기가 바쁘게 와락 사나이의 손이 내 어깨를 휘감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뿌리쳤으나 사병의 팔은 쇳덩어리 같이 억셌다.
나는 급한 김에 한국 말로
『애이 개자식아!』
하고 그 얼굴에 침을 탁 뱉았다.
사병은 내 기세가 너무 강함에 놀라 손을 노았다.
『나에게는 「달라」가 있다. 너는 「달라」를 원하는 것이 아니냐?』
키큰 사병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한다.
『바보자식, 사람을 똑똑히 봐!』
하며 돌아서서 총총걸음으로 왔다.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니 분했다. 그들에게 그렇게 보인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몸에 진흙이 띤 것 같이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