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 어제는 論爭(논쟁)과 迫害(박해) 오늘은 痛悔(통회)
우리는 「남」일 수 없다
謙遜(겸손)하고 互讓(호양)하면 하나가 될 수 있어
발행일1964-06-07 [제425호, 1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과 「올스독스」 사이에 불화가 있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 이 불화가 있는가?
①이 문제는 어렵다. 「올스독스」는 가톨릭과 매우 가깝다. 그러나 그는 교황의 무류지권과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은 더 심각하다. 그는 성체 속에 예수의 현존과 고해와 동정 성모께 대한 대부분의 교리와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은 대체로 교회안에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성서에 맡긴다.
②교리에 관해 가지고 있는 불화를 희박하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매우 위태로울 것이다 그 불화는 때로는 심각하고 그것은 신앙을 위한 어떤 요소적인 태도에 저촉된다. 만일 「프로테스탄」이나 「올스독스」가 우리가 믿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면 그들은 이점에 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형식에 동의할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프로테스탄」과 「올스독스」의 「옵서버」 앞에서 공의회가 하고 있는 중요한 일은 이러하다. 즉 신앙의 교리를 위태롭게 함이 없이 그럴지라도 주교단은 교회의 신앙을 좀 더 잘 관례화 하기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노력은 이렇게 어떤 기본적인 문제에 관한 견지를 접근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③현재 갈려져 있는 우리의 형제들중 아무도 교회역사 가운데 어떤 때 그런 경우가 있었듯 오늘 형식속에 자기 신앙을 가두어 두기를 원치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권위에 겸허하게 대화하는 시대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
④불화를 과소평가함이 없이 각 교파의 대표들은 오늘 각자가 겸손되이 신앙의 재보(財寶)에 의한 더 좋은 것을 하려고 하고 성신의 덕으로 사람들에게 천주의 「메시지」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추진중에 있다.
▲「프로테스탄」은 동정 마리아를 믿지 아니한다고 한다. 그들이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의 새로운 신앙 개조로 정의된 교리를 승인하기를 거절한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의 품속에는 천주의 계획 속에 동정 마리아의 역할에 유의하는 신학자들도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프로테스탄」은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해의 실천이 그들로부터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아니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오늘날 고해를 찬성하는 자들이 있다.
▲성사로서의 혼배와 사제직과 성전에 대해 「프로테스탄」이 생각하는 것은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모든 견지에서 일치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의하자. 이모든 견지에서나 또 다른 모든 견지에서 성신의 작용에서 서로 서로 계시에 더 부합한 공식에 대해 대화하고 그것을 탐구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모두 유일한 교회의 대들보이다. 즉
-만인의 주시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 계실 뿐이다.
-성서는 천주의 생활한 말씀을 발견하는 원천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받는 성세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회원이 된다.
보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공통적인 가재(家財)이다. 여기 또 첨가할 것이 있다. 즉 가톨릭과 「올스독스」와 「프로테스탄」교회의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다같이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시요 주이신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또 우리는
-『내가 너희들을 사랑함 같이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하신 그의 계명과 『너희들은 따 극변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하신 그의 사명과
-『나 세상 마칠때까지 너희들과 함께 있노라』하신 그의 현존의 약속을 알았다.
각 교파의 교회에 들어가보라. 거기 각각 다른 특징을 볼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특징적인 것은 성체를 모신 제대가 있는 것이다. 「올스독스」 교회에 들어가 보면 하늘의 성인들과 매우 친근한 감을 느낄 것이다. 「프로테스탄」교회의 특징적인 광경은 성경책을 보는 것이다. 갈려진 신자들은 이렇게 달리 교회를 만들고 있다. 각자가 다른 교파를 이해하기에 고심하고 있다. 「로만가톨릭」과 희랍 로서아의 「올스독스」와 「프로테스탄」이나 성공회가 서로 「남」이 되어 있다.
이것이 일치를 위한 장애이다. 「빠리」의 국립 도서관에 가면 휴그노의 학살을 그린 처참한 사건의 그림이 있다. 서로 분리된 이래 서로 서로 많은 악한 짓을 감행했다. 그의 상처는 아직 아물리지 아니했다. 이것이 일치에 지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극복할 수 있는 장애이다 왜냐하면 능욕에 대한 용서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작년 9월 29일 「바티깐」공의회 제2회기를 시작할 때 바오로 6세는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언하고 교회란 「타이틀」과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종도들이 짓기 시작한 교회란 확고하고 심오하고 완전한 관념을 지닌 가톨릭교회와 다른 그리스도 교파의 역사적 그리고 지리적 광대한 발전이 있은지 20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리스디아니즘」을 아직 더 확실한 방법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놀래서는 아니된다. 교회는 한가지 신비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언제나 새롭고 더 깊은 탐구의 대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 6세는 또한 계속해서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이 분리의 원인 가운데 한가지 과실이라도 우리를 규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겸손되이 천주께 용서를 청하고 우리로 말미암아 상한 형제들에게 관용을 베풀자. 또한 논쟁과 분리의 긴 세월동안 우리가 경험한 쓰라린 고통을 잊어버릴 각오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