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17) 大院君(대원군)에게 請願書(청원서)를 낸 「鍾三(종삼)」
尊敬, 輕蔑 함께 받아
발행일1963-11-10 [제398호, 3면]
서울에서도 산 일이 있는 요안.남(南鏡三)은 본시 고향은 제천이며 일찌기 충주의 원을 지낸 남 아오스딩(상교)의 양자로 들어갔다.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경상도 영해의 군수를 지냈다.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며 의덕과 정결과 가난 가운데서 모범적인 관리 생활을 함으로써 교우들에겐 존경의 대상이 되고 한편 동료들에겐 경멸의 대상도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겸손의 덕은 뛰어났으니 자기의 훌륭한 가문과 높은 벼슬 깊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교우이건 종이건 다 천주한테 조성되었지 천주대전에 누가 양반이 될 수 있는가. 그러니까 교우 중엔 양반이란 있을 수 없어』 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벼슬에 따른 미신행위 때문에 한 때는 교회를 떠난 일도 있고 해서 영해 군수를 그만둔 후로는 고향에 은퇴하여 오로지 천주께만 봉사하려던 차에 대원군은 그에게 승지라는 높은 직임을 맡겼다.
남 요안이 잡히게 된 이유는 그가 천주학을 따른다는 것 외에 홍 도마(봉주)와 함께 대원군에게 제출한 청원서 때문이었다. 그 청원서에서 당시의 로서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주교를 만나 의논할 것을 대원군에게 권고한 것이다. 대원군은 처음에 이 제안에 호감을 가졌었지만 차차 침입의 위험이 사라지게 되니 도리어 이 청원서를 박해의 구실로 삼았다. 장 주교의 체포의 소식을 들은 남 요안은 자기 자신의 체포도 시일 문제임을 깨닫고 제천의 배론학당을 찾아가 고해 영성체로써 순교의 준비를 하는 한편 피신 중 고양군의 한 주막집에서 서울 포졸한테 마침내 잡히게 되었다. 때는 병인년 2월말(양)이었다. 곧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도청에 갇혔다가 얼마 후에 의금부로 옮겨지니 거기서 장주교와 다른 신부들을 만나게 되었다. 요안이 문초중 다른 교우들을 대라는 말에 『그런 말은 두 번 다시는 거듭하지 말라』라고 딱 잘라 대답할 뿐이었다. 요안은 또한 앞 무릎에 매 30대를 맞았으나 한 말 없이 용감히 참아 받았다.
홍 도마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남 요안은 수레 위에 실려 서소문 밖으로 향했다. 그날은 3월8일이요 새남터에서 장주교와 새 신부가 순교하시기 몇 시간 전이었다. 수레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다 손발을 묶은 다음 언덕을 내려 달리게 하니 십자가에 매달린 몸이 얼마나 떨렸으랴! 형장에 이르러 남 요안은 눈을 내려감고 혼연한 얼굴빛으로 형리의 수차의 칼을 받고 순교하니 때에 나이 54세였다. 약 보름이 지나서야 교우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 부근 왯고개에 묻었던 것인데 후에 민대주교에 의하여 서울 명동성당 지하실에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