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25) 고적감 ③
발행일1963-11-10 [제398호, 4면]
버스 속에서 어디로 갈까 하고 한참 생각해 보았다. 만만하기는 강숙이네 집인데 아직 학교서 돌아오지 않았을 거다. 저녁까지의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까가 걱정이다. 영화관에 들어가자니 돈이 없다. 음악감상실에 가자니 돈이 없다. 도서관에 가자니 푼돈조차 없다. 어딜 갈래도 돈의 벽(壁)이 가로 막는다.
멀거니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란 짧았다. 어느 틈에 버스는 종로에 이르렀다. 그대로 타고 있으면 그 버스는 서울역을 거쳐 용산까지 간다. 문득 동이네 집에나 가자는 결심을 하고 종로에서 버스를 내렸다. 다시 오던 방향으로 버스를 탔다.
동이네 집이 있는 골목을 들어서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 친어머니가 아니라 해도 친어머니같이 정이든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내가 살던 집을 지나니 낯선 문패가 붙어있고 울 안에서는 낯선 남녀의 소리가 난다. 어떤 사람이 사는가 하고 비꿈이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어머니와 나하고 소근소근 얘기하던 아늑한 안방 문이 보이고 대청에는 얼굴이 우락부락 생긴 남자와 오목조목 예쁘게 생긴 부인이 사이 좋은 제비 모양 나란히 앉아서 킬킬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하던 광경이었다.
동이네 집에 들어설 적에, 될 수 있는대로, 명랑한 표정을 가졌다.
『아이고, 나순이 오래간만이구나』
동이 엄마는 자봉침을 하고 있었다.
『그 가방은 뭐니?』
『아버의 심부른 갔다오는 길이야요.』
나는 명랑한 기분을 내기 위해서 일부러 잘 할 줄 모르는 콧노래를 읊었다.
『뭐니, 그 속에 든게?』
『옷인가봐요. 아버지가 친구네 집에 맡겨둔 걸 찾아오는 길이야요?』
『너 그새 더 컸구나? 어디 일어서봐라. 거반 내 키만 하구나!』
동이 엄마는 아래위로 훑어보며 놀란듯한 표정을 한다.
『아주머니, 나 인제 애 아니니, 사실을 얘기해 주세요. 우리 집은 어디야요, 고아원이죠?』
나는 심각한 기분을 내지 않고 물었다.
『누가 그러든, 널 고아원에서 데리고 왔다구?』
『아버지의 눈치도 그런것 같애요.』
『그건 네가 괘니, 잘못 생각한 거다. 그럴리 없다.』
자봉침을 향하여 옆으로 앉은 동이 엄마의 옆얼굴에 주지하는 기색이 보인다. 나는 어느 틈에 남의 눈치를 읽는 습관이 든 것 같다.
『내가 고아라는건 알고 있어요. 고아면 어때요 지금 아버지가 친아버지같이 날 귀여워 해주시니 괴롭지는 않아요. 이뎀에 크면 아버지 봉양은 잘 할테야요』
이 말은 동이의 엄마의 무거운 입을 살며이 열어 제키는 효력이 있었다.
『그래, 길러주신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낳은 것이 부모가 아니다. 키우는 것이 부모다』
『부모의 이름이나 알고 싶은데 아버지는 가르쳐 주지를 않아요』
『…아버지가 네 친부모가 따로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더냐?』
『네에』
동이 엄마는 조심스런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낳은 어머니는 지금 어디 있어요?』
『……』
동이 엄마는 미싱에서 손을 떼고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내 앞에 가까이 와서 앉는다.
『너의 아버지가 거기까지 얘기를 하셨다면, 내가 돌아간 너의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하마…』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참고, 동이 엄마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해방 이듬해 봄에 한 일본인 여자가 적십자 병원에서 애기를 낳았다. 그 여자는 부모도 없고 혼자인데, 생활난으로 그 때 서울에 와 있던 미군장교 한 사람을 알게되어 그 애기를 낳았다고 한다.』
『그 애가 난가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 애기가 바로 나순이 너다!』
『미군 장교는 어디 있어요?』
『장교는 네가 낳기 석달 전에 서울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단다.』
『그래서요?』
얼굴이 닳아오르고, 묻는 내 입술은 떨리었다.
『그 때 너를 길러준 돌아간 어머니가 병원의 간호원으로 있었고, 바로 너를 받았다고 한다. 너를 낳은 일본여자는 사흘 후에 떠날 일본 가는 배를 타게 되었는데 데리고 갈 수도 없고, 두고 갈 수도 없어, 울며 고민하더란다. 누구든지 잘 키워줄 사람이 있으면 맡기고 가겠다고 하더란다. 애기의 얼굴이 하도 예쁘길래 간호원하던 너의 엄마가 키우겠다고 맡았단다. 너의 어머니는 너를 맡으면서 일본간 뒤에도 애 생각이 난다고 편지는 하지 말라. 애는 네 자식으로 키울 것이니, 이댐에라도 내가 어머니라고 나서지 말라. 이런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 일본 여자 어떻게 생겼대요?』
『너의 엄마 말이, 나 비슷하게 생겼다고 한다. 눈이 크고 키도 후리후리 하더란다. 이름이 아사다 도시꼬라고 하더라.』
『아사다 도시꼬…』
나는 입 속에서 나를 낳은 사람의 이름을 외워보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얼굴이 순간 그립다. 나는 동이 엄마를 바라보며, 나를 낳은 친어머니의 얼굴을 그 속에서 더듬었다.
『눈만 닮고 딴 데는 안 닮았데요?』
나 모양으로 얼굴이 갸름했다나 보더라』
내 얼굴은 갸름한 편은 아니니, 얼굴 윤각은 아버지를 닮았는지도 몰랐다.
『너의 돌아간 어머니는 너에게 친어머니나 다름 없었다. 너의 어머니는 아사다 도시꼬가 아니고 돌아간 이다.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돌아간 이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모가 부탁하고 간 그 정의가 돌아간 이의 몸에 배여 있었던건만 같다.
나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오랫동안 흑막에 싸였던 것이 벗겨지니, 깨끗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나라는 존재가 이 지구상에서 조그마한 티와같이 미약해 보인다. 어슴푸레 짐작은 한 일이지만, 막상, 「베일」을 벗기고 보니 의지할 곳 없는 고독감이 밀물결같이 밀려든다.
나는 저녁 밥할 때까지 그 집에서 책을 보았다. 책을 보면서 생각은, 딴 데를 헤맸다. 하늘로 날린 고무 풍선이 점점 조그매지듯이 나라는 존재가 자지러드는 것만 같다.
어느듯 책에서 시선을 떼고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얘!』
돌아보니 동이 엄마의 커다란 눈이 내 곁에 와 있다.
『…너는 이제 다 컸으니. 조금도 그런 일에 구애할 것은 없다. 가슴을 버티고 명랑해야 한다!』
동이 엄마의 격려의 말은 고맙기는 했다. 그만큼 내 얼굴은 그늘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웃는 얼굴을 보였다.
『아마 너의 어머니도 훌륭하고 너의 아버지도 똑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만 운명이 너를 친부모와 떨어지게 한 줄 알아라. 지금의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알고, 남이야 뭐라든 너만 잘 하면 된다. 너의 예뿐 눈, 고운 피부, 늘신한 체격을 자랑으로 알렴…』
나는 방바닥 위에 시선을 준채 고개를 끄덕 했다.
퇴기라는 점에서 남에게서 볼 수 없는 이점과 장점을 몸에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들은 자랑할만한 것이라고도 생각해본다. 고적감을 내던지고 휘파람을 불었다. 유쾌할 때면 휘파람을 부는 버릇이 있다.
『너 남자같이 휘파람을 잘 부는구나?』
『처음에는 헛김이 새더니 자꾸 부는 동안에 이제는 웬만한 남학생 아이들보다 잘 불어요!』
나는 신이 나서 유행가를 불렀다.
밥 한끼라도 벌 생각으로 저녁밥 때까지 앉았다가 권하는대로 얻어먹고 가방을 들고 나섰다.
길러준 양부의 은혜도 생각해 보았으나 돌아갈 생각은 안 난다. 발걸음은 강숙이네 집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 혼자 이 세상을 견디어 나가보자!)
내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