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15) 시골본당
밭고랑에 세워둔 「성모경」
「미네아포리스」에 한국 「붐」
발행일1964-06-07 [제425호, 3면]
그야말로 벽촌이었다. 「미네아폴리스」시에서 백리 떨어진 곳에 「마케트」란 농촌이 있었다. 미국의 농가를 엿보기에 충분한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본당신부님의 자동차로 10여호밖에 안되는 이 마을로 접어드는 자동차길에서 광고판 같은 것이 눈에 번쩍 띄는 것이었다.
말이 시골길이지 자갈을 깐 달구지길이 아니고 「아스팔트」길이었다.
약3백「미터」 간격을 두고 밭고랑 위에 간판이 세워져 있는데 흰 바탕에 검은 글로만 씌어져 있다. 광고판 치곤 유난히 점잖구나-감탄하면서 유심히 보니 그것은 「성모경」의 기구문이었다.
『청송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3백「미터」가량 더 가니 또 하나의 보람판이 꽂혀 있다. 『네게 하례 하나이다.』 또 50「마일」 속도의 자동차가 이 글월을 머리속에서 되뇌일 시간이 지나가니까 『주 너와 한가지로 계시니』… 글귀가 나온다. 이같이 성모경이 약 5리가량 밖에서부터 이 마을로 인도한다.
『신부님! 난 저게 뭔가 했어요?』
『그래 어떻습니까? 저 「아이디어」가?』
약간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참 훌륭한 「아이디어」에요. 정말 이 마을 전체가 성모님의 은혜 속에 살 것만 같아요. 참 기발한 착상이신데요』
『뭐 제 창안이 아닙니다. 「레지오 마리에」단원들의 생각이죠.』
신부님은 내가 발한 찬사를 「레지오 마리에」 단원한테 돌려달라고 겸손한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미네아폴리스」 교구 「레지오 마리에」의 「꾸리아」 지도신부님이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보니 마치 성당을 중심하여 마을이 형성된 듯한 인상이었다.
산마루 등성이에 서울 중림동(약현) 성당만한 크기의 벽돌성당이 우뚝 서있었고 그밑에 사제관이 그 반대편엔 국민학교와 수녀선생의 집이 있었다. 약 10여호밖에 안되는 마을이지만 갖출것은 다 있었다. 물론 농가는 이 마을 밖 농토 위에 띠엄띠엄 산재해 있긴 했지만. 목조건물의 낡은 집이 은행이라 했다.
직원 셋이서 이 농촌 일대의 농민들의 금고 구실을 하고 있었다. 한 열평가량 밖에 안되는 곳이다.
우체국은 우체국장 혼자서 한사람의 고용인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성당에 오신 손님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네? 어떻게 대끔 그렇게 맞치세요』
동양사람 보고 대뜸 『한국분인가요?』하고 묻는 미국인이란 그리 많지 않다. 무슨 한국과의 인연 있는 분이 아니고서는 대개 『중국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일본사람인가요?』라고 물은 다음 『아뇨』 해야만 마지막으로 『그럼 한국사람이군요』하고 묻기가 일쑤인 것이다.
『어떻게 한국사람중에 아시는 분이라도? …혹시…』
『네! 우리 친구중에 지금 한국에 가 있는 분이 있어서 이야길 많이 듣고 있죠』
25년만에 처음 밀려온 한파와 눈보라와 온 마음이 오들 오들 떠는듯이 보이는 1월 11일이었다.
본당신부님 댁세어 사슴고기까지 먹고 나왔는데도 살을 베는 듯한 추위에 목이 어깨 속으로 푹 파묻혀 졌다.
성당 안에 조배하러 들어갔다.
이 추위에 「코트」를 벗은 여인들이 반소매를 입고 신공을 하고 있다. 「스팀」열로 성당 안은 온대지방의 온도(섭씨23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화씨로만 온도 표시함)
이것이 바로 미국의 농가들이 있는 시골 강촌의 성당의 풍경인 것이다.
아무리 한국에서 귀히 여기는 사슴뿔을 달여먹고 또 이곳 와서 사슴고기까지 먹었지만 부강한 미국의 농촌경제의 자랑(성당의 스팀)이 없었던들 추위에 오들오들 떨기만 하고 조배신공조차 못바칠번했다. 그날밤 「레지오 마리에」 「꾸리아」 회의에 참석했다. 큰 도시인 「미네아폴리스」에서 있었다. 약 백여명이 강당에 모였다. 진지하고 화기 애애한 모임이었다. 순서는 한국에서 진행하는 것과 같았지만 문제의 제시 토의사항의 종합 등 실로 흐뭇한 회의 진행 분위기였다.
서울교구 내에서 처음으로 「레지오 마리에」를 시도(試圖)해 봤던 아로서는 감회 깊을 수밖에 없는 참관이었다.
지도신부는 난데없이 회의 막판에 가서 『저 한국에서 오신 신 도마스씨를 소개합니다.』하고 나의 신상소개를 했다.
소개 직전에 「한국의 가톨릭」이란 제하로 「스피치」한 신부의 내용에 감명을 받은 이들 백여명의 「꾸리아」간부들은 한국사람 얼굴만 봐도 박수를 칠 정도로 한국 「팬」이 된듯 하다.
물론 이곳은 헨리(玄) 대주교님이 나신 지역이 되서 이곳 교우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어지간히 깊은상 싶다.
미국 교우집에서 한국 교우들 사진과 광주대교구의 현 대주교님 사진 등을 신주 모시득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의 한국과의 인연 있는 고장이란 것을 이미 느끼긴 했었다.
자가용으로 사방에서 모여든 「레지오 마리에」 단원들은 밤10시반경 해서야 한국말 성가까지 감상하고 흩어졌다.
수백리 밖에서 온 단원들도 자가용으로 시골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골 본당」 교우란 차등의식은 어느모로도 발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