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화가이며 또한 건축가인이기도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3월 6일 「피렌체」 부근의 「카프레제」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을 「세티나뇨」의 대리석공의 가정에서 보낸 그는 1488년 「피렌체」의 화가인 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조각가 베르톨도 디 죠반니의 지도를 받았다. 나이 어린 미켈란젤로의 탁월한 천재적 재능은 곧 당대의 「피렌체」의 지배자인 로렌조 디 메디치의 인정을 받게되어, 그의 궁정에 머물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고대예술에 접함과 동시에 고금의 저작을 연구하여, 깊고 넓은 교양을 쌓았다. 1494-95년의 「볼로냐」여행에서 그는 야코포 델라 엘르챠의 강한 감화를 받았고, 1496년에는 「로마」에 가 「피에타」(로마, 산 피레트로 대성당 소장) 「취한 바키스」(피렌체 국립미술관 소장) 등의 대리석상을 만들었다.
1501-5년 「피렌체」에 머물고 있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시의회의 주문을 받아 명작 「다비데」의 거상을 제작하였다. 1501-4년의 제작인 이 「다비데」는 청년 다비데가 「페리시테」의 도전자인 「가테」의 골리아태를 향하여 막 돌을 던질 것 같은 순간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높이 5.50「미터」의 거상이다. 이 상은 「피렌체」의 자유를 수호하는데 성공한 시정부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53년 동안이나 이전서부터 다른 조각가들이 파다가 그대로 버려둔 대리석괴를 이용하여 「피렌체」시의 자유와 정의를 상징하는 다비데상을 만들기로 하여 당시 26세인 미켈란젤로에게 시의 비용으로 의뢰하였던 것이다. 그는 처음 4주간 동안에 원형을 만들고 1501년 9월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504년 이 거대한 대리석상을 완성하였다. 완성되자 그 건립장소 문제로 위원회에서 논의하던중 결국 각자 자신의 의향을 존중하여 「피렌체」 전 시민의 가장 중요한 집회장소인 정청 「팔라쪼 베키오」 앞의 광장에 세워졌다. 시민들도 이 상을 「거인」이라 불렀고 자유도시 「피렌체」의 수호자로서 매우 아꼈다.
이 「다비데」의 제작을 계기로 하여 미켈란젤로의 조각미술은 일대 비약을 가져왔고 당당한 그의 역량은 고금에 드문 인체미의 유형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팔라쪼 베키오」의 대회의실에 벽화 「피사의 싸움」을 그려(미완성)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고 또 대담한 구도를 가진 「성가족」(피렌체 우피지 미술관 소장)을 그렸다. 1505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 내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소를 만들기 위해 「로마」에 갔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일을 중단하고 「시스티나」부속 소성당의 천정화 제작에 종사하게 되었다. 1508년 5월에 착수하여 4년이 더 걸린 1512년 11월에 완성된 이 천정화는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홍수」 등 구약성서에서 취제한 장면들을 중심으로 예언자 여자 청년 어린이 등 도합 343명으로된 장대한 화면이다.
현기증 나는 높은 천정에 발판을 걸어놓고 그 위에서 부자유한 몸을 놀리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노고를 쌓아 혼자서 그려낸 미켈란젤로의 초인적인 노력과 정열은 과연 경탄할만 하다.
자기 스스로 벽에 흙칠을 하고 채색을 풀어서 묵묵히 인루의 운명과 비극과 그로인한 장엄성들을 조형화하여 간 그의 밤낮의 모습은 광적인 모습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수척할대로 수척하였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 그가 건강을 유지하였는지 신기할 뿐이다.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몸을 보신하였는지 말고 싶으나 아무런 기록도 없다.
1909년 10월에는 이미 중앙부를 끝마치고 일단 발판을 풀어헤쳐 대중에게 관람시켰다. 이때 그와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티깐」궁에 벽화를 그리고 있던 파라엘로도 이것을 보고 실로 경탄할 수 밖에 없었고, 자기의 화풍에까지 퍽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대 천장화를 완성하였을 때의 그의 나이 37세였고 작품제작의 장쾌한 속력은 신기에 가깝다.
웅대한 구도, 힘찬 묘선, 인물의 두드러진 체격, 명암에 의한 조소적인 「모델링」 등 그의 회화 고유의 특색을 유감없이 발휘한 일대 걸작이다. 뒤이어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의 제작에 착수하여 「모세」(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소장) 「노예」(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등 몇점의 걸작을 남겼다.
특히 깊은 지해에 비분분의 정을 서리게 한 거대한 「모세」상은 높이가 2.55「미터」나 되는 마치 산과도 같이 당당한 대리석상(1513-16년경 제작)으로서 이스라엘의 입법자로서의 권위를 과시하고 있다. 실로 미켈란젤로의 조각적 육질을 대표하는 완성된 작품이다.
1517년 이후 다시 「피렌체」에 거주하였고 1521-1534년에는 「산 로렌조」성당에 메디치가의 묘비를 건설하였다.
1534년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아주 떠나 「로마」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요청으로 1534-1542년 「시스티나」 부속 소성당의 대벽면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이처럼 실감있고 박력있게 그려진, 그리스도교 미술은 다시 없을 것이다.
한편 미켈란젤로의 건축상의 주요 설계로는 「피렌체」의 「산 로렌조」성당의 정면, 「비블리오테카 라울렌치아나」의 계단실과 「로마」의 「캄피돌리노」언덕 위의 광장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대원개(돔)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본영은 그 자신도 지부하였듯이 조각이며, 조각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압도적이다.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정화가 완성되었을 때 그는 「조각가, 미켈란젤로」라는 「싸인」을 남겼다. 다방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그의 탁월한 능력과 온갖 특질은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제롤의다른 면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같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웅대하고 삼엄한 이상주의이며 힘과 정열과 거대한 궁극의 모습을 드려내주고 있는 인간상들이다. 더우기 그의 깊은 주관성과 격렬한 내면적인 힘의 강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하여 대표되는 성기 「르네쌍스」의 고전주의를 넘어서서, 다음의 「바로크」시대의 예술에 직접 연결됨과 동시에 16세기 이탈리아 조각의 전형이 되고, 지배력이 되었던 것이다.
劉槿俊(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